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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홍](3) 한국식 대신 실리경영, 순익 3배 뛰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한인은행의 '처음' 벤자민 홍

앉아서 영업하는 방식을 타파하고 '고객을 찾아가는 마케팅'을 도입한 것도 벤자민 홍 전 행장이다. 홍 행장(맨 왼쪽)이 한인 마켓 앞에서 한미를 홍보하고 있다. [벤자민 홍 전 행장 제공]

앉아서 영업하는 방식을 타파하고 '고객을 찾아가는 마케팅'을 도입한 것도 벤자민 홍 전 행장이다. 홍 행장(맨 왼쪽)이 한인 마켓 앞에서 한미를 홍보하고 있다. [벤자민 홍 전 행장 제공]

벤자민 홍 전 행장은 한인은행 처음으로 합병을 시도했다. 홍 행장(맨 왼쪽)과 고 안응균 한미은행전 이사장(가운데) 하동용 글로벌은행장이 합병 합의를 축하하고 있다. [벤자민 홍 전 행장 제공]

벤자민 홍 전 행장은 한인은행 처음으로 합병을 시도했다. 홍 행장(맨 왼쪽)과 고 안응균 한미은행전 이사장(가운데) 하동용 글로벌은행장이 합병 합의를 축하하고 있다. [벤자민 홍 전 행장 제공]

철저한 성과제·여성 지점장 발탁 등 조직 바꿔
무담보 신용대출·SBA융자로 수익모델 혁신


벤자민 홍 전 행장은 직원 교육과 함께 한국식 경영의 틀을 과감히 부쉈다. 명분보다 효율성과 수익성에 더 초점을 맞추고 실리를 추구하는 경영 방식으로 바꿨다. 반발과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한미은행의 조직 문화도 확 뜯어고쳤다. 또 올림픽에 있던 본점을 당시 LA 월스트리트로 불리던 윌셔로 옮기는 등 도약의 발판을 다졌다.

▶오래된 틀을 벗다

한미를 포함한 한인은행권엔 직책과 서열을 우선하는 한국식 경영 마인드가 만연했다.



홍 행장은 일단 상의하달식 의사결정 방법을 하의상달로 뒤집었다. 일선 책임자에게 권한을 주어서 고객이 윗선에 부탁해도 소용이 없다는 인식을 심어 줬다. 중요 아젠다는 회의를 통해서 결정해 잡음을 없앴다.

보상체계도 연공서열에서 직무와 성과 중심으로 전면 개편했다. 우수한 성과를 낸 직원에게는 급여 인상, 보너스, 승진 등 두둑하게 보상했다.

“흔히 말하는 애사심은 직원이 조직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고 느낄 때 생깁니다. 인정은 곧 급여 인상과 승진입니다. 보상이 명확해야 다른 직원들도 열심히 일합니다. 보상 없이 애사심만 강요하는 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받은 것 같지도 않은 보상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걸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시 한인은행들은 대출을 ‘해준다’는 입장이었다. 갑의 위치다. 대출 수요가 많아 그럴 만도 했지만, 이는 당시 한국은행의 고객에 대한 고압적인 태도가 한인은행의 고객 서비스에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은행 직원이 고객에게 점심을 접대받는 걸 상상할 수 없었던 그에게 그런 상황은 문화 충격이었다.

“은행원이 앉아서 영업하고 고객에게 접대를 받으며 대출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촌지도 있었습니다. 말이 안 되는 …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객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그 비용을 은행에 청구하는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눈치를 보고 사용 방법을 몰라 거의 식사비를 청구하지 않았지만 ‘찾아가는 마케팅’을 시작하면서 이런 영업 방식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는 촌지에 관한 일화도 들려주었다.

하루는 현금 1000달러가 든 편지 봉투 한 통이 사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그 봉투를 밀봉해서 고객인 건설 업체 사장에게 되돌려 보냈다.

그 사장은 기분이 나빴는지 수개월 연락이 없었다. 홍 행장은 먼저 전화를 걸어 점심식사를 청했다. 그와 만남에서 업체 대표는 “너무 빡빡하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홍 행장은 “행장이 촌지로 1000달러를 받으면 전무는 얼마를 받아야 하고 부장은 얼마를 받아야 하겠냐”며 반문했다. 그는 “촌지를 주지 않아도 대출 요건만 되면 쉽게 돈을 빌릴 수 있도록 은행을 운영할 테니 믿어달라”고 말했다.

그런 일화가 은행과 고객들에게 알려졌는지 그 이후 촌지가 종적을 감췄다고. 촌지를 없앤 홍 행장은 가슴에 띠를 두르고 한인 마켓 앞으로 달려갔다.

기존의 틀을 부순 건 이뿐만이 아니다. 당시 은행권에는 남성 위주의 권위적인 문화가 팽배했다.

그는 그 틀을 깨야만 다른 은행과의 차별화도 꾀할 수 있고, 조직 문화도 바꾸어야 직원 간 선의의 경쟁을 끌어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과감하게 유능한 여성 행원을 지점장으로 발탁하고 임명했다. 당시만 해도 여성 지점장 임명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그래서 남성 임원들의 반발이 심했다고 기억했다.

“고객의 요구를 찾아 나서고 그의 어려운 사정에 공감하는 능력은 여성 행원들이 탁월했습니다. 그런 여성들이 지점장으로서 영업 일선에서 선봉에 나서는 것만이 후발 주자인 한미가 급성장할 기회라 여겼습니다.”

오픈뱅크의 민 김 행장이 당시 한미는 물론 한인은행의 최초 여성 지점장이었다고 한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여성 지점장들의 활약으로 한미은행의 실적도 동반 상승세를 탔다.

▶길은 내가 개척한다

1980년대 후반만 해도 한인은행들의 대출방식은 담보 설정을 요구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무담보 신용대출을 받으려면 은행 요건을 맞추어야 하는데 당시엔 매우 까다로웠다. 갓 도미한 이민자가 요건을 충족시키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 홍 행장은 무담보 여신이 은행 성장의 추진체가 될 것이라고 이사회를 설득해 관철했다. 무담보 여신의 위험성이 컸지만, 대출과 순익 급증에 일조했다.

그뿐만 아니다. 지금까지 한인은행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인 SBA융자를 처음 도입한 것도 홍 행장이다.

은행의 성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수입원을 찾던 중 SBA융자가 눈에 띄었다. 연방정부의 보증 부분이 커서 다른 대출 상품보다 안전했고 성장 중인 한인 이민 사회에도 적합했다. 여기에 한국의 경제 발전으로 인한 무역 금융까지 추가하면서 한미은행의 수익 구조가 탄탄해졌다.

이와 더불어 1988년 8월부터 한미은행의 주식이 장외시장(OTCBB)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다. 한인은행 역사에서 첫 장외 거래 역시 그의 작품이다.

주당 12~13달러에 거래되던 주식은 1989년 말에는 10달러가 껑충 뛰어 거래가 이루어졌다. 매수 수요에 부응하고자 90년 1월 19일 자로 1대2 주식분할을 단행했다. 한인은행 중에서 한미은행이 주식분할도 처음했다.

1987년 한미은행의 연순익은 105만 달러 정도였지만 홍 전 행장이 취임한 3년 후에는 3배가 넘는 384만 달러로 껑충 뛰었다.

홍 행장은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한인은행 최초로 다른 은행과의 합병을 시도했다. 글로벌은행과의 합병은 최종 성사를 앞두고 틀어졌다.

그는 “글로벌 은행장을 경영진으로 합류하는 옵션을 제시했다면 합병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만 해도 처음 시도했던 거라 거기까지 생각을 미처 못했다고 한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바꾸고 싶은 일 중 하나다.


진성철 기자 jin.sungch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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