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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은 낭만여행]독일의 칼브와 스위스의 몬테뇰라

헤르만 헤세의 발자취를 찾아 1

독일의 칼브(Calw)와 스위스의 몬테뇰라를 여행했다. 이곳을 여행한 목적은 헤르만 헤세의 발자취를 찾아 그의 행적을 찾고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헤세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는 튀빙겐, 바젤, 베른, 가이엔호펜, 취리히, 인도, 스리랑카 등이 있지만 칼브는 헤르만 헤세가 태어난 곳이고 몬테뇰라는 그가 말년을 보낸 후 생을 마감한 곳이다.

칼브는 소박하고 조용하며 아름다운 목조 가옥들이 줄지어 서있는 작은 마을이다. 빠른 걸음으로 다니면 1시간이면 마을 전체를 모두 돌아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헤세의 고향집, 헤세 박물관, 산책로, 니콜라우스 다리 등 볼 것이 많아 반나절 이상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 헤세는 1877년 7월 2일 개신교 선교사인 부친 요하네스 헤세와 모친 군데르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가는 슈바벤 지방의 스위스계 출신인데 외할아버지는 인도 선교사 출신으로 학식(박사)이 매우 높은 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케랄라 주에서 사용하는 말라알럄어와 산스크리트어(고대 인도의 표준 문장어)를 읽고 구사할 수 있는 인도어 전문가였다. 특히 말라알럄어는 문법 정리와 사전 편찬까지 하여 케랄라 주(탈라세리)에는 그의 업적을 기린 동상까지 세워져 있다. 1911년 헤세가 인도를 여행한 후 산문집 인도에서와 소설 싯다르타를 발표한 것은 외할아버지의 영향이 가장 컸던 것으로 보인다.

헤세가 4살이 되었을 때 가족은 모두 바젤로 이사를 하게 된다. 부친이 바젤에서 발간되는 선교회지의 공동발행인으로 발탁되었기 때문이다. 1886년에 헤세 일가는 다시 칼브로 왔고 헤세는 라틴어학교인 칼브 실업학교에 입학했다. 1891년(14세)에는 선교사 수업을 받기 위해 마울브론 수도원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헤세는 가슴 속 깊이 시인의 꿈을 가지고 있던 예리하고 영민한 학생이었다. 그는 학교에 다닌지 6개월만에 도망치다 붙잡혔으며 학교로부터 엄한 처벌을 받는다. 그 후유증으로 헤세는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친구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자살까지 생각하는 극한 상황이 되자 아버지는 그를 다시 칼브로 데리고 왔다. 두 달 정도 슈테텐 정신병원에서 요양한 그는 칸슈타트 고등학교에 입학 7학년 수료 자격 시험을 치룬다. 헤세는 그 후로는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다. 성숙한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무리를 지어 있는 것 보다는 홀로 공부하는 것이 낫다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헤세는 이때부터 책과 늘 함께 있는 서점 점원의 일을 시작하게 되는데 1895년(18세)부터 3년동안은 튀빙겐의 헤켄하우어 서점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신학, 언어학, 법학 등 서적 분류하는 일을 하며 책을 열심히 읽고 틈만 나면 시를 썼다. 서점에서 12시간씩 일하며 공부한 책으로는 그리스 신화, 신학, 문학, 철학 등 다채로웠는데 특히 괴테, 레싱, 실러, 니체 등의 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남들이 모두 쉬는 일요일에도 그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시와 소설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그의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다. 시집은 자비로 출간한 것이었다.

튀빙겐에서 시작한 서점 점원 일은 바젤의 라이히와 바텐뷜 서점으로 26세(1903년)까지 이어진다. 그 때 만난 사람이 9년 연상의 마리아 베르누이다. 그녀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스위스에서는 최초로 자신의 아틀리에를 운영하던 여인이다. 헤세와 베르누이는 함께 여행을 다녀 오기도 했으며 바젤의 예술가 모임에도 동행하여 서로간의 사랑을 확인한다. 장편 소설 ‘페터 카멘친트’가 출간되어 큰 성공을 거둔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여름에 가이엔호펜에 있는 빈 농가로 거주지를 옮겼다. 두 사람과의 사이에서는 브루노, 하이너, 마르틴 등 세 명의 남자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녀는 교양 있는 여인으로 음악적인 재능도 뛰어나 피아노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헤세는 1911년, 화가 슈투르제네거와 함께 아시아 여행길에 올라 인도, 스리랑카, 말레이지아 등을 여행한다. 그래서 칼브와 몬테뇰라의 헤세 박물관에는 그들이 아시아 여행길에서 구입한 불상 등 기념품과 슈투르제네거가 그린 말레이 여인의 초상화 등이 전시관에 진열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15년에는 부친의 사망, 아내의 정신분열 악화, 막내의 중병 등 어려운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결국 헤세는 정신과 치료를 받은 후 몬테뇰라의 카사 카무치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어려운 일들 속에서도 헤세는 붓을 놓지 않았는데 이때 발표한 작품이 크놀프다. 크놀프는 실연의 상처를 입고 자유롭게 세상을 떠도는 인생의 낙오자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지만 그는 고독한 인간으로 폐에 병까지 얻게 된다. 피를 토하며 절규하는 그에게 ‘너는 나의 친구이며 내 몸의 일부다’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그는 평온한 죽음을 맞는다. 헤세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전세계 독자들에게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하는 감동을 안겨 준다.

칼브에는 4개의 중요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 첫 째는 움직이는 세 인물(1986년)로 칼브에서 제일 먼저 제작된 청동상이다. 도시의 시각적인 풍경 예술을 만들기 위해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 길가에 세웠다. 두 번째는 교회 앞에 세워진 ‘경의’라는 제목의 청동상이다. 조각가 크라우스 헤닝의 작품으로 금욕적인 여성의 모습을 담았다. 세 번째는 2001년 세워진 헤르만 헤세 실제 크기의 청동상이다. 청동상은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니콜라우스 예배당과 나콜트 강이 흐르는 니콜라우스 다리 위에 세웠다. 헤세를 찾는 독자들이 감격해 하며 어루만지고 기념촬영을 하는 유명한 장소다. 네 번째는 2010년, 마을 입구에 세워진 방랑자 크놀프의 청동상이다. 크놀프는 마을로 들어 오는 모든 사람에게 미소를 보내며 칼브 방문을 환영한다. 칼브에서 또 돌아 볼 곳으로는 마을 위쪽 숲 속에 이어진 헤세의 산책로다. 산책로는 아름다운 검은 숲길로 길가 곳곳에는 헤세의 시가 쓰인 안내판이 여러 개 세워져 있다. 칼브는 울창한 산림으로 잘 알려진 검은 숲의 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여행팁: 슈트트가르트 중앙역에서 기차(S6)타고 - 바일데어슈타트(Weil der Stadt):400분
역 앞에서 670번 버스 갈아 타고 - 칼브까지 25분(편도요금: 기차+버스=13.3유로)

글, 사진: 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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