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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순 아바이만 있었어도"…북 대표단 탄식의 속뜻은

평양 분위기 '천기누설' 했나
서울 체류 장웅 북한 IOC 위원
북 냉담에도 대화 재개에 미련
잇단 도발에 냉온탕 대북정책
'압박과 대화' 병행은 어정쩡
제재 이행 집중할 새 틀 짜야


첫 스텝이 꼬였다고 생각될 땐 발 빠른 판단과 결단력이 생명이다. 고집을 부리며 질질 끌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개인사나 사회적 관계는 물론 정치나 국제 관계도 마찬가지다. 오늘로 출범 92일째를 맞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 갈팡질팡하고 있다. 당국 대화 전략이 엉망인 게 드러났고, 북한을 보는 인식과 대북 접근 방식은 구태의 답습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같은 현안 대처도 미덥지 못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통일북한전문기자·통일문화연구소장

6월 말 서울을 방문한 북한의 장웅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남북 관계와 관련한 북한 내부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언급을 한 것으로 파악됐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소식통은 8일 "장웅 위원이 당국 대화 재개와 남북 스포츠 교류 행사 등을 촉구한 우리 측 인사들에게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노동당의 대남 라인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에게 남북 대화와 관련한 소통을 하기 힘든 상황임을 드러낸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북한 태권도 시범단을 이끌고 방한한 장웅은 공식 행사 외에 만찬과 참관 행사를 통해 남측 당국자와 민간 인사들을 접촉했다.



장웅 위원은 이 과정에서 "양건 동지나 용순 아바이가 살아 있었다면 얘기가 통했을 텐데…"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는 게 정부 당국의 파악 내용이다. 언뜻 보면 노동당 대남정책을 총괄한 베테랑 김용순·김양건 두 통일전선부장의 부재(不在)를 아쉬워하는 듯한 말투다. 하지만 이를 두고 김정은 정권에서 대남 비둘기파의 입지가 좁아진 데 따른 불만을 은연중에 토로한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실세 통일전선부장이던 김용순과 김양건이 사라진 뒤 김정은에게 직접 조언할 측근이 없어진 걸 염두에 둔 발언이란 얘기다.

노동당 국제부를 거쳐 1992년 말 대남 담당 비서에 오른 김용순(2003년 사망)은 북한 대남통 사이에 '용순 아바이'란 애칭으로 불린다. 그는 98년 6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 당시 판문점 통과를 반대하던 군부를 단번에 제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그해 11월 금강산 관광 시작 때도 "군사 요충지를 남조선 관광객과 정탐꾼에게 내줄 수 없다"는 군부 주장을 꺾었다. 통일부 당국자는 "김용순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직접 설득한 결과라는 게 북측 인사들의 귀띔"이라고 설명했다. 김용순과 마찬가지로 당 국제부장을 거쳐 통일전선부장에 임명된 김양건 통일전선 비서(남측에선 '대남담당 비서'로 통칭)는 2014년 10월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차 남한을 방문했다. 그는 당시 박근혜 정부의 대북 메시지를 김정은에게 직접 전하는 등 실세 대화파로 간주됐다. 김양건이 2015년 말 교통사고로 급사하자 강경파에 의한 살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장웅의 토로대로 북한은 태권도 시범단의 방남(訪南)을 스포츠 차원에 국한했다. 정부 소식통은 "북한 대표단에 대남 요원인 통전부 소속은 없었고, 공안기관인 국가보위성 멤버 등으로 채워졌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장웅 일행을 경색된 남북 관계의 돌파구를 여는 지렛대로 삼으려고 무리수를 뒀다. 대통령은 북한 대표단이 함께한 전북 무주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장까지 달려가 강원도 평창 겨울올림픽에 북한 선수단이 참여하는 문제를 공개 제안했다. VIP석에 있던 장웅의 이름을 직접 호명하면서 관심과 협조를 부탁해 부담을 떠안겼다. 평양 귀환에 앞선 외신 인터뷰에서 장웅이 "북남 관계를 체육으로서 푼다는 건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다. 기대가 지나치다"고 한 건 불쾌감의 표시로 해석된다. 문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 그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면 된다"고 평가절하했다. 그 이후 북한의 행로는 말 그대로 나타났다.

정부 당국은 장웅의 비공개 발언을 함구에 부쳤다. 그러고는 지난달 17일 북한에 군사당국회담과 적십자회담을 동시에 제안했다. 그것도 회담 날짜와 장소를 못 박는 방식을 취했다. 회신 방법까지 담았다. 남북회담에 오래 관여한 통일부 관계자는 "끊겼던 당국 대화를 복원하려는 경우에는 대개 '시기와 장소는 귀측이 편리하게 정해 알려 달라'고 하는 게 호응 가능성을 높이는 지혜"라고 꼬집었다. 마치 결혼 상견례를 앞두고 예비 사돈 측에 '언제 어디로 나오라'고 통보하는 일방적 태도로 비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북한은 문재인 정부의 대화 드라이브에 잇따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4형' 도발로 응수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을 '적(敵)'으로 지칭하며 응징을 주문했다. 북한 전역을 타격할 지대지 탄도미사일 현무-2C 시험발사를 직접 참관하기도 했다. 보수적 대북정책을 추진한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도 없던 일이다. 다른 한편으론 우리 민간단체들이 북한 민주화와 외부 정보 유입을 위해 펼쳐온 대북 전단 보내기 운동을 중단시키는 방안을 강구하라는 지시를 내린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노무현 정부 당시 북한이 중단을 요구하자 '고압가스관리법 위반'이란 해괴한 법리로 제지한 전철을 되밟으려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통일부 등 대북 부처는 북한 도발 응징을 외치면서도 '대화 병행'을 빼놓지 않고 챙긴다. 대통령과 청와대의 속내를 누구보다 잘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대북 억제의 집중력은 떨어지고, 국민과 국제사회에 속마음을 자꾸 들키고 만다. 결과는 안팎에서 밀어닥치는 신뢰와 진정성의 위기다.

북한은 군사·적십자회담 제안에 24일째 묵묵부답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북한이 명확한 거부는 안 하고 있지 않느냐'면서 태연한 척한다. 국방부는 군사회담 날짜로 제시한 7월 21일이 지나자 7.27 휴전협정일까지 지켜보자고 하다가 이젠 말을 잊었다. 6·15 선언 남북 공동행사를 북한이 걷어차자 8.15 행사를 기대했지만 또 무산됐다. 이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2차 남북 정상회담 합의물인 10·4 선언 10주년을 기다리는 눈치다.

평양의 기별을 학수고대하는 사이 유엔과 국제사회는 김정은의 버릇을 고치겠다며 제재의 고삐를 더욱 죄고 든다. 후견국인 중국과 러시아도 만장일치 의결에 팔을 걷어붙였다. '압박과 대화의 병행'이란 우리 정부의 어정쩡한 노선은 끼어들 틈조차 없어 보인다.

날은 무덥지만 그제 입추가 지났다. 갈팡질팡하다가는 집토끼도, 산토끼도 다 잃을 판이다. 동네방네 인심을 잃는 것도 시간문제다. 대통령과 대북 참모들은 이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취임 석 달여를 꼼꼼히 복기해 볼 때다. 그 속에 어긋난 나침반이 있고, 새로운 이정표가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죽은 '용순 아바이'는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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