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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정 칼럼] 미친 사랑

P씨 집에서 ‘세 여자’가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다. P씨가 봄에 어울리는 색색의 팬지 꽃으로 예쁜 화전과 맛있는 음식을 해놓았다. 음식과 바느질 솜씨 등,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P씨는 긴 파마머리가 잘 어울리는 매력적인 ‘여자’다. L씨는 살림꾼이고 패션 감각이 뛰어난 멋쟁이 ‘여자’다. 나는 멋 내는 것은 물론 무엇이든 신경 쓰는 일은 무조건 귀찮아 하는 게으른 ‘여자’다.

좀 늦게 도착한 L씨는 아주 큰 보따리를 들고 들어왔다. 백화점에서 세일이 시작되어서 손자손녀 옷을 한 두 벌만 사러 간 것이 그만 그렇게 많이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경하라면서 옷 장사 보따리마냥 큰 보따리를 풀어헤쳤다. 보따리 안에서는 각양 각색의 손자 손녀의 옷이 쏟아져 나왔다. 나도 한국에 가려고 손자 옷을 두 어 벌 사놓았는데, L씨의 옷 보따리를 보니 내가 너무 조금 산 것 같아 갑자기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사실 더 사고 싶어도 아들 며느리 마음에 들지 모르겠고, 딱히 마음에 드는 것도 없어서 망설이다가 두어 벌만 사 놓았던 것이다. L씨는 자신도 한 두 벌 사려다가 이렇게 되었다며 이게 무슨 ‘미친 사랑’인지 알 수 없다며 웃었다.

자식이야 내가 낳았지만 내가 낳지도 않은 손자에 대한 과도한(?) 사랑은 대체 어찌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보통의 아기인 손주가 세상에서 제일인 것 같고 남들 다하는 짓 하는 것이 무슨 천재가 난 것 같이 호들갑스럽게 예쁘니 말이다. 손주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단 한 번, 첫눈에 반해서 상대방인 손주는 알지도 못하는 못 말리는 ‘미친 사랑’이 시작된다.

생각만 해도 무슨 스릴 있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가슴이 짜릿하게 사랑스럽고 어느 새 그리움이 솟구치는 손주 사랑은 참 주책스러울 정도다. 그 주책스러움을 굳이 설명하자면 숱한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숨차게 살던 젊을 때와 지금의 시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젊을 때는 부모에게서 독립해 자신들만의 삶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모든 것이 서툰 상태에서 내게 속한 자식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압박감과 의무감이 너무 컸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우리가 양육의 의무감에서 한 걸음 물러난 상태에서 손주를 볼 수 있으니 자식 때보다 무조건 예쁘게 느껴지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사실 손주 예쁜 것에 이유나 설명은 사족에 불과하다. 이렇게 무작정 손주한테 빠져버린 눈치 없는(?) 할머니들이 자신의 손주들 사진이나 동영상을 억지로(?) 보게 하는 바람에, 동영상은 50불 내놓고 보여줘야 하고 사진은 30불 내놓고 보여줘야 한다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다. 드디어 L씨도 이 시대의 할머니답게 핸드폰을 꺼내어 손자 손녀가 이유식을 먹다가, 온 얼굴과 가슴에까지 묻힌 사진을 보여 주었고 우리는 이유시기 아기의 평범한 일상을 매우 신기한 일을 보는 것처럼 감탄사를 연발하며 깔깔댔다. 굳이 중년(?)의 ‘여자’이고 싶어 하던 우리는 손주들 이야기에 망설임 없이 ‘여자’는 잊고 단번에 ‘할머니’가 되어 행복해 했다. P씨는 똑똑하고 깜찍한 손녀 이야기를 했고 나는 서울에 있는 손자 이야기를 했다. 남들이 들으면 재미없는 이야기들이겠지만 우리는 진지했다.

젊었을 때는 자식을 다 키운 사람은 무조건 ‘늙은이’로만 보였다. 그렇게 나이가 들면 무슨 재미로 사나 했던 적이 있다. 다 성장한 자식들과 그들의 자식들이 커가는 것이 삶의 큰 기쁨이며 진정한 재미인 것을 젊었을 때는 알 리가 없다. 나이에 맞는 재미가 다 따로 있다는 어른들 말씀의 의미를 당연히 알지 못했다. 바야흐로 이제 젊음이 알 수 없는 즐거움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할머니가 되는 것도,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또 다른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누구도 내년을 살아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미친 사랑’에 빠져 초로의 길목을 뜨겁게 달구며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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