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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흡 기고] 아! 6. 25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한때 낙동강까지 밀리면서 대한민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낙동강 방어선은 백척간두의 국가 운명을 결정짓는 결전장이 되었다. 북한군은 대구 점령을 1차 목표로 삼았다. 교통 중심지인 데다 국군과 미군의 사령부가 있었으므로 정치적 중요성도 무척 컸다. 대구로부터 25km 북쪽에 위치한 다부동은 대구로 향하는 길목에 있어서 한국군과 미군, 그리고 북한군 모두에게 중요한 지점이었다. 국군 1사단(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강변 전투를 종료하고 8월 12일에 Y선의 최후 저지선에 투입됐다.

그러나 북한군의 압력은 갈수록 거세어져 1사단은 8월 12일 Y선으로 물러났다. 백 준장은 13연대를 왼쪽에 배치해 낙동강을 굽어보는 328고지를 점령하게 하는 한편 12연대를 중앙의 수암산과 유학산에 배치하고 우익인 11연대를 전차 접근로인 천평동 계곡 좌우에 있는 산줄기에 배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12연대가 유학산과 수암산에 이르고 보니 북한군이 밤사이 샛길로 들어와 미리 점령하고 있었다. 사단의 중앙부 고지에 적군이 자리 잡은 것이었다. 1사단은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공격해야 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의 이점을 살리려면 반드시 유학산과 수암산을 확보해야만 했다. 전선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싸움도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마다 접근전이었고 소총을 쏘기도 어려워 수류탄전으로 치러졌다. 육박전도 드물지 않았다. 당연히 병력 손실이 많았다. 이 어려운 상황을 1사단은 잘 버텨냈다. 8월 15일은 그야말로 ‘위기의 절정’이었다. 사단의 모든 정면은 서로 몸으로 뒤엉키는 백병전 양상이 됐다. 고지 곳곳마다 시체가 쌓이고 시체를 방패 삼아 싸우는 지옥 그 자체였다.

8월 16일 왜관 일대에 6·25 전쟁에서 전무후무한 대규모의 융단폭격이 실시됐다. B-29 전략폭격기 98대가 폭탄 960톤을 목표지점에 투하했다. 8월 17일 미군 27연대가 다부동에 이르렀다. 1개 전차중대와 2개 포대가 배속된 강한 화력을 가진 부대였다. 이튿날 국군과 미군은 일제 공격에 나섰다. 미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계곡을 따라 수월하게 전진했으나 산줄기를 따라 공격에 나선 국군은 많이 나아가지 못했다. 그날 밤 북한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우고 공격해왔다. 미군은 3.5인치 로켓포, 전차포, 그리고 야포로 적군 전차들과 자주포들을 파괴하고 보병 100여 명을 사살했다. 북한군의 이런 야간공격은 모두 일곱 차례 있었는데 모두 패퇴했다.



8월 19일엔 미군 2사단 23연대와 국군 8사단 10연대까지 1사단을 돕기 위해 27연대 후방에 배치되었다. 국군과 미군의 3개 연대가 동원됐을 만큼 다부동 전투는 중요했다. 27연대의 좌측 능선을 엄호하던 11연대 1대대가 기선을 제압당해 다부동 쪽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급보가 날아들자 미 1기병사단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은 8군 사령부에 철수하겠다고 보고하였다. 긴박한 순간이었다. 백선엽 장군이 후퇴하는 병사들 앞으로 달려갔다.

“모두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 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이렇게 말하고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선두에 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에 병사들도 사단장의 뒤를 따라 돌격했고 대대는 삽시간에 고지를 재탈환했다. 8월 21일 다부동 전투는 절정으로 치달았고, 8월 22일 전세가 국군과 미군 측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고지 아래 불리한 지형에서 싸워야 했던 12연대가 드디어 유학산 정상의 적을 섬멸하고 고지를 탈환한 것이었다. 치열한 전투였던 만큼 피아간에 많은 전사자가 났다. 국군은 2300명이, 북한군은 5690명이 전사했다. 종군 문인으로 싸움터를 찾았던 시인 조지훈은 뒷날 ‘다부원에서’라는 시에서 당시의 끔찍한 정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낙동강 방어선의 정면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만일 국군과 미군이 인민군에 의해 돌파당했다면 임시수도인 대구가 곧바로 함락되었을 것이고,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붕괴되었을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면 남은 것은 미군의 철수였다. 결국 다부동 전투는 대한민국의 붕괴를 막아낸 전투였다.

한반도에서 포성은 멎었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 공화국이 그동안 굶어 죽고 얼어 죽으면서 진행해온 일을 쉽게 포기할 것 같은가?” 김정일이 남긴 말이다. 이어서 그는 통일 후의 구상을 가리키는 발언도 하였다. “통일된 공화국은 5000만 인구로 운영될 것이다!” 지금 남북한을 합치면 7000만이 넘는다. 그러니까 적화통일이 되면, 2000만을 제거하겠다는 뜻이다. 1000만은 도망가게 두고, 1000만은 반드시 죽여야 할 자들이라고 하였다. 게다가 이제 김정은은 핵무기를 가졌다. 한반도엔 먹구름이 끼고 있다. 아! 6·25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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