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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그럴 수도 있지, 남자가 쪼잔하게!

백일학
2017년 텍사스 중앙일보 한인 예술대전
문학부문 우수상

평범한 일은 쉽게 잊어버리는 편인데 내 속에 오래 남는 악수의 기억이 있다. 언젠가 악수하자고 내미는 내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내 등을 격려하듯 두드리던 분이 있었다. 어! 왜 이러시나? 덤덤하게 넘긴 줄 알았는데 이후 음식이 목에 걸려 안 넘어가듯 기억의 통로에서 당시 일을 자꾸 끄집어내어 되새김질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그의 과장된 몸짓과 표정을 떠올리면 잔잔하던 내 감정의 호수에 이내 돌이 던져진다. 나와 비슷한 연배인데 마치 아랫사람에게 하는듯한 태도가 나의 자존심을 은근히 건드린 것이다. 상처 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어렵게 아내에게 말을 꺼냈는데 오히려 쫑코를 먹었다. “그럴 수도 있지. 남자가 악수 가지고 쪼잔하게!” 공감해 줄줄 알았던 아내의 반응이다. “흥, 당신은 남자들의 세계를 잘 몰라서 그래!”

사실 2-3초간 손을 마주잡고 흔드는 짧은 시간에도 남자들은 서로 말없는 대화를 주고 받는다. 몸짓과 태도, 분위기와 표정으로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다. 상대에 따라 손을 쥐는 악력의 세기와 느슨함, 두 손으로 잡는가? 얼마나 오래 잡는가? 허리는 뻣뻣하게 버티나? 또는 얼마나 굽혀야 하는가를 재빠르게 계산한다. 상대가 내 손을 잡고 어깨 넘어 두리번거린다면 이것도 내게 매우 불쾌하다. 반대로 혹 내가 너무 무례한가? 실수하는 것은 아닐까? 짧은 순간에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마구 교차한다. “그래, 단순한 아녀자가 복잡한 남자들의 문화를 알 수가 없지!” 그렇게 반박해 보아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내의 말이 맞다 는 것을 안다. 악수한 상대는 기억도 못 할 텐데 나만 툭툭 떨쳐버리지 못함으로 마음의 평안을 잃은 것이다. “쯧쯧, 쪼잔 하기는...”

35년간 지속되는 우리 부부의 연애와 결혼기간을 뒤돌아 보면 앞뒤 재지 않고 좌충우돌하며 실수하던 나보다 조용히 기도하며 차분히 의견을 내던 아내가 항상 옳았다. 마흔을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불혹의 나이라 한다. 나는 이제 마흔의 기억이 아득하게 지나가버린 쉰 후반의 나이다. 이 나이는 어떤 일에도 감정의 흔들림 없이 묵직해져야 하는데…. 실상은 작고 사소한 일에도 여전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나이 들어가며 아내는 점점 더 포용력이 넓어지는데, 나는 점점 더 밴댕이 소갈머리가 되어간다. 눈치를 채고 보니 세 명의 자녀들을 은밀하게 자기편으로 만들어 버린 아내는 언제부터인가 가정의 실질적인 구심점이 되어있다. 되돌아보면 자녀들이 매사에 가르치려 드는 아빠보다 차분히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엄마의 편인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아내에게 혼나는 분야가 또 하나 있다. 나는 도로 위에서 운전대를 잡고도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한다. 아내에게 계속 말을 들어도 여전히 그 때뿐이다. 젊은 날에 비해 운전습관이 많이 젊잖아 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도로 위에서 주변의 차들에게 으르렁대는 경쟁본능이 살아있다. 밀려있는 도로에서 차례를 기다리면 끝에 위험하게 끼어드는 운전자들이 꼭 있다. 그러면 반사적으로 속력을 내어 끼어들기를 방해하거나 실패하면 궁시렁 거린다. 상대가 여자면 더 심하게 반응한다. “여자가 건방지게시리..” “뭐 여자가 어떻다고?” 아내가 이내 젊은 날의 나의 운전 기억을 되살려준다. “당신은 더 심했잖아.” “맞다! 바쁘면 끼어 들 수도 있지.” 기꺼이 양보하거나 조금 더 인내하지 못함으로 내 마음의 평안을 잃어 버리고 내 입까지 더러워지는 것이다.



나는 휴스턴에 거주하면서 지금도 일년의 반은 해외출장을 다닌다. 일인(one person) 기업으로 국내업체 하수처리설비 시장개발 및 영업대행을 하는 나는 지속적으로 지구 반대편 개발도상국들까지 긴 비행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장거리 비행은 정말 왕 짜증이다. 계속되는 장거리비행은 나의 인내의 한계에 도전하곤 한다. 생각해보라. 좁은 공간에 몇 백 명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처음 보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열 몇 시간씩 가두어 놓는 것은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고문이다. 가끔 인도의 중소도시에라도 가려면 비행기를 서너 번 갈아타고 40시간씩 걸려 푹 익은 파김치가 되어 도착하곤 한다. 그런데 가격이 이코노미의 두 세배 되는 비즈니스석은 여전히 엄두가 안 나서 나는 아직도 가장 싼 이코노미석 만을 고집한다.

이코노미 좌석은 앞뒤 옆으로 비좁아 공동의 팔걸이나 눕히는 등받이의 각도로 주변사람들과 신경전이 펼쳐진다. 서로의 공간은 침범하지 말자는 사회적 약속은 간단히 무시된다. 갑자기 뒷사람의 발이 팔걸이위로 불쑥 나타나면 기겁을 하기도 한다. 안쪽에서 화장실을 가려면 주르르 일어나 비켜 주어야 하고, 뒤에서 앞줄의 등받이를 확 잡아당겨 곤한 잠을 깨워 놓기도 한다. 문을 안 잠그고 화장실 일을 보다가 문 여는 나를 당황케 하거나, 일보고 물 안 내리기 등은 차라리 애교에 속한다. 더럽게 쓴 화장실은 내가 닦고 쓰면 된다. 울어대는 애기는 귀마개를 하고 시간이 지나면 그친다. 그러나 더 참기 힘든 것은 옆에 앉은 남녀의 끊임없는 애정행각이나 끊임없이 다리를 흔들어대는 사람이다. 뱃살이 흘러 넘쳐 내 좌석까지 침범하는 경우도 힘들고 큰 소리로 코를 골면서 자는 사람도 참아내기 힘들다. 좌석 안쪽에서 공짜 맥주라고 한없이 마셔대면 아니나 다를까 30분마다 한번씩 화장실을 가기 위해 비켜 달란다. 그리고는 돌아와서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또다시 마셔댄다. 줄기차게 앞뒤로 돌아다니며 비행기에서 걷기 운동하는 사람도 정신 사납다.

이런 것에 짜증을 내곤 했다. 이것은 조현아가 일등석에서 마카다미아 넛을 봉지째 가져왔다고 짜증을 내거나, 포스코 상무가 비즈니스석에서 라면이 덜 익었다고 짜증을 내는 것보다 훨씬 더 짜증의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상급 좌석들에 비해 돈을 덜 냈기에 견디어 내야 하는 더 큰 불편함일 뿐이다. 내가 짜증을 내면 주변사람도 내게 짜증낸다. 좁은 공간에서 한번 관계가 틀어지면 비행시간이 서 너 배는 더 길게 느껴 진다. 짜증을 지속하면 출장지에 가서도 일에 집중이 안 된다. 집에 오면 가족들에게까지 짜증이 전파된다. 그러나 불편함 속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빼앗기지 않으면 불편함도 덜어진다. 내가 먼저 양보하면 된다. 내가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면 된다. 마음이 편하면 몸의 불편은 그럭저럭 견딜 만 하다. “그럴 수도 있지” 내속에서 자꾸 되 뇌야 한다. 마음의 평안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내게 더 유익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욕을 많이 먹는다. 왜 교인들이 욕을 먹을까 생각해 보았다. 세상사람들은 기독교인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 교회를 나가면 안보는 척, 지켜 본다. 나와 무엇이 다른가? 그런데 이들도 자기들과 똑같이 불경기로 인해 근심하고, 자기들과 똑같이 이웃과의 관계로 힘들어하고, 자기들과 똑같이 불편함에 짜증내고, 자기들과 똑같이 권리를 주장하고 불평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자기들과 다른 점이 전혀 없어 실망한다. 그렇게 살려면 교회는 왜 나가니? 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내 속에 남이 알지 못하는 평안이 있는가? 그래서 기꺼이 나의 당연한 권리를 양보하고 포기하는가? 오늘도 내게 묻는 나의 숙제이다. 아마도 나의 인생의 숙제일 것이다. 아직까지는 내게 “당신 속에 있는 평안의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오는 사람은 없다. 쪼잔 하게 행동하는 내 속에 남다른 평안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백일학
2017년 텍사스 중앙일보 한인 예술대전
문학부문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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