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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칼럼> 김 영 종

콜로라도주 노인회관 뒷뜰의 '진짜 쌀 막걸리'

제18대 콜로라도주 노인회장 이-취임식이 열렸던 지난 6월28일 초저녁, 노인회관 뒷뜰에 마련된 조촐한 음식상에 '진짜 쌀 막걸리'가 등장했다.

 세숫대야 만한 유리 다라이(함지)에 가득 담긴 뽀얀 젖빛깔의 막걸리는 한눈에도 요즘 흔한 공장제품과는 달라보였다.

출렁이는 막걸리 위에 둥둥 떠 흔들거리는 쪽박주걱이 운치를 더했다.

 한쪽 테이블에선 콜로라도 한인사회에서 내로라하는 애주가인 민병욱, 최영권, 김인중, 정용수, 박흥규씨등이 쪽박으로 술을 떠 서로의 빈잔에 연신 부어주며, 권커니 자커니 유쾌한 대화를 이어갔다.



한병철, 제이 킴, 조석산씨등이 합세했다.

저쪽 테이블에선 정일화, 이영길, 조영석, 엘리자벳스 김을 비롯, 신문기자들도 자리를 함께했고,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먼 길을 허겁지겁 달려온 김종구회장은 술잔을 들고 이 테이블, 저 테이블 옮겨다니며 분위기를 돋웠다.

한낮의 찌는 더위가 선들선들한 바람으로 바뀐 회관 뒷뜰-, 감칠맛 나는 산나물 안주에 '입속에 짝짝 달라붙는' 진짜 쌀막걸리 맛과 함께 '이명박 - 촛불' 안주가 추가메뉴(?)로 보태지면서 분위기는 한층 더 고조돼 갔다.

그런데 누구일까? 이처럼 맛좋은 진짜 쌀막걸리를 빚어내온 솜씨좋은 장인(匠人)은?

하지만 아쉽게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본인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극구 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쌀 10kg짜리 2포대와, 손바닥만한 개당 5불짜리 누룩 7개를 한인마켓에서 사다가 집에서 손수 빚었으며, 정작 본인은 술을 한잔도 못마시는 60대중반의 여성으로, 어렸을적 친정 어머니한테 배운 솜씨라는 사실만 전해졌다.

이날 음식상에 오른 막걸리는 두 말 남짓-.물을 안 붓고 짜냈기 때문이며, 물을 붓고 걸르면 서너말은 족히 나온다고 한다.

따라서 이날 막걸리는 그야말로 오리지널 쌀막걸리 엑기스(原液)였던 셈이다.

이처럼 훌륭한 우리나라 쌀막걸리가 요즘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원래 막걸리는 구한말까지만 해도 집에서 김치처럼 누구나 담궈 먹던, 술이라기 보다 음식에 가까운 영양만점 먹거리였다.

빛깔도 엄마 젖과 비슷해, 아기가 엄마 젖만 먹고도 살 듯, 밥맛을 잃어 곡기를 끊은 허약한 노인도 막걸리는 넘길 수가 있고, 오로지 막걸리만 마셔도 한 두 해는 연명할 수가 있었다.

땡볕아래 고된 농삿일로 지칠대로 지친 젊은이 역시 새참에 딸려나온 막걸리 한사발에 불끈 힘을 얻곤 했다.

이처럼 소중한 쌀막걸리 맛을 최초로 훼손시킨 장본인은 일제(日帝)였다.

동네마다 양조장을 짓도록 한 뒤, 밀과 옥수수로 막걸리를 빚게해 그것만 사서 마시도록 했다.

귀한 쌀을 아낀다는 것이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식민통치를 위한 '초강력 장치' 였다.

수백,수천년동안 밥이나 김치처럼 집에서 만들어 먹어온 막걸리를 어느날 돌연 '밀주'라고 이름붙여 옆구리에 칼을 찬 순사들이 한 집안의 가장(家長)을 체포해 갔다.

1910년 한일합방후 발효된 소위 '양조법'이다.

또 하나의 식민통치 초강력 장치는 '산림법'이었다.
장작의 대체연료인 석탄 역시 말잘듣는 이들에게 채광권을 내줘 백성들은 그걸 사서 때도록 했다.

조선 가옥은 아궁이가 장작을 때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나무를 베면 또 순사들이 잡아갔다.

동네 어귀에 일본순사가 떴다하면, 아낙네는 막걸리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윗마을로 달아나고, 남정네는 쌓아둔 장작더미를 짚으로 덮어 숨기느라 이리뛰고 저리뛰는 상황이 열흘이 멀다하고 벌어졌다.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들어놓고, 일본순사들이 눈감아주지 않으면 조선땅에서 살아갈 수가 없게끔, 실로 악랄한 장치를 해놓은 것이다.

'촌놈 과천부터 긴다'는 속담이 나올정도로 양반댁 기와집을 최고크기의 건축물로 바라보며 살던 시절, 어마어마한 돌덩이로 지은 조선총독부(옛 중앙청)가 조선백성의 기를 초장부터 꺾어놓는 식민통치의 하드웨어였다면, '양조법'과 '산림법'은 악질적 양대(兩大) 소프트웨어였다.

또한 조세수탈의 수단이기도 했다.

세금이라곤 땅세(地稅)가 전부, 대원군때 통행세가 있었다는 얘기만 들어온 조선백성들에게 주세(酒稅)라는 것이 부과되기 시작하더니, 대동아전쟁에 이르러 무려 전체 국세(國稅)의 33%까지 올라가게 된다.
막대한 수탈이다.

이처럼 무심코 마셔온 술 한잔이 인류사, 특히 국가경제에 미친 영향은 어느나라를 막론하고 실로 엄청나다.

프랑스같은 나라는 "땅밑(와인 숙성저장 탱크)의 돈이 땅위(은행 및 시민들의 호주머니)의 돈보다 많다"고 할 정도다.
이들 나라의 수출장려품목 1호는 바로 술이다.
술을 통해 정치,경제,사회상(像)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튼, 일제에 의해 한차례 크게 훼손된 우리나라 전통 막걸리 맛은 해방 후 한동안 다시 살아나는듯 하더니, 박정희정권에 의해 또 한차례 훼손되고, 1980년대에 이르러선 양조업체들에 의해 완전히 박살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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