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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칼럼> 김 영 종

술이야기-2 소주'로 '막걸리' 몰아낸 박정희 정권

전 세계를 통틀어 술의 종류는 몇가지나 될까? 모르긴 해도 아마 수억 가지는 될듯 싶다. 마을마다 각각 자기들 나름대로 담궈 마셨기 때문이다. 세계 인구를 60억명이라고 봤을 때, 현재의 인구비례로 따져 그 옛날 한 부락 인구를 50~60명으로 계산 하더라도, 줄잡아 1억가지의 술이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술 종류가 아무리 많아도 발효주냐 증류주냐, 또, 원료가 곡물이냐 과일이냐에 따라 '곡주(穀酒)'와 '과실주(果實酒)' 4가지로 분류된다. 쌀을 발효시키면 막걸리가 되고, 그 막걸리를 증류시키면 소주(燒酒)가 된다. 마찬가지로 붉은 수수를 발효시키면 홍주(紅酒)가, 홍주를 증류시키면 마오타이 같은 백주(白酒)가 된다. 여배우 공리가 주연해 아카데미상을 휩쓴 중국영화 '붉은 수수밭'에 그 제조과정이 소상히 소개된 바있다.

러시아에선 고구마를 발효-증류시켜 보드카를 만들고, 쿠바에선 사탕수수를 원료로 럼주를 만든다. 유럽의 경우 스코트랜드 지방에서 자생하는 보리의 품질이 맥주 원료로는 세계최고다. 이 보리를 발효시키면 맥주가 되고, 그걸 증류시키면 소위 스카치위스키가 된다. 과실주는 더 간단하다. 원료가 거의 포도에 국한돼 있다. 포도는 프랑스에선 어느 지방에서나 지천에 깔려있는 데다가, 당도가 과일중에선 가장 높아 오늘날 와인(발효주)과 브랜디(증류주; 예, 코냑)가 대표적 과실주로 명성을 얻고있다.

 우리나라 막걸리 얘기로 되돌아가 보자.



막걸리는 발효주다. 알콜농도는 원래 4~5도. 쌀알의 영양분이 그대로 살아있어 술이라기보다 보양(保養) 간식이었다. 이승만정권 시절, 일제(日帝)가 꽉막아놓은 단속이 느슨해지면서 온 국민이 무척이나 즐겨 마셨다. 1950년대 애주가들, 그 중에서도 문인,화가등 예술인들이 특별히 많이 마셔댔다.

서울 명동에 진짜 쌀막걸리만 파는 '은성'이라는 유명한 대폿집이 있었다. 주인아줌마가 성격이 수더분 하면서도 머리에 든게 많아선지 문인,화가들이 즐겨찾았다. '은성'의 주인 아줌마는 바로 탤런트 최불암씨의 어머니였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의 서정시인 박인환, 공초 오상순, 담배값 은박지에 철필로 불후의 명작을 남긴 요절한 천재화가 이중섭,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의 천상병등을 비롯, 당대 최고 지성인들이 '은성'을 무시로 드나들며 막걸리를 퍼마셔댔다. 정치 야망이 컸던 신사깡패(?) 이화룡등이 간간이 이 집에 들러 가난한 지식인들 술값을 곧잘 대신 내주곤 했다.

왜들 그렇게 억세게 마셔댔는지---. 진짜 쌀막걸리가 너무 맛있어서 였을까, 6.25전쟁의 뒷끝을 못견뎌한 당대 지성인들의 몸부림이었을까. 박인환 시인은 어느날 술에 만취해 겨우 집에 들어왔으나 이튿날도, 사흘째날도 좀처럼 깨어날 줄 모르더니 그 길로 영면하고 말았다.

일제가 우리나라 쌀막걸리 맛을 최초로 훼손시켰다면, 두번째로 훼손시킨 장본인은 박정희 정권이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수출 드라이브에 올인한 박정권은 1963년8월 소위 '양곡관리법'을 확대강화, 온 국민이 마셔온 국민주를 막걸리에서 소주로 바꿔나가는 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국주(國酒)는 외국 사신들이 왔을때 접대하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술이고, 국민주(國民酒)는 양으로 따져 그 나라 국민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술을 칭한다. 당시 국민주는 당연히 막걸리였다.

박정권이 담대하게도 이걸 인위적으로 바꿔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쌀 한톨 안섞인 '99.9% 에칠알콜 술'이 세계최초로 탄생했다. 지금의 '희석식소주'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급변하기 시작한 1960년대, 지방에서 쏟아져 올라온 도시 빈민들이 큰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서울역 뒷편 만리동 언덕, 성남시등지에 무허가 판자촌을 형성한 이들은 밤이면 밤마다 도둑질에 강도짓을 일삼았다. 박정권은 이들 도시빈민들의 생계 해결책으로 세계에도 없는 길거리 포장마차를 허용했다. 그때부터 싼값에 금세 취하는 소주가 길거리에서 마구 팔리면서 막걸리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국민주는 막걸리였다. 대학축제 마당엔 늘 함지박보다 큰 고무다라이에 막걸리가 가득 담겨, 입장료를 내고 축제장 안에 들어온 학생들이 그걸 스스로 퍼마시는게 유행이었다. 그런데 오나가나 정치꾼이 문제였다. 돈 챙겨 먹는데 벌써부터 눈을 뜬, 야무지게도 장래 국회의원이 꿈인 학생회 간부녀석들이 막걸리 다라이에 막소주를 마구 쏟아 부었다. 덜 마시게해 남는 돈을 떼어 저희들끼리 나눠먹을 심산에서 였다. 한국최초의 폭탄주 '쏘막'은 이렇게해서 태어났다.

더우기 '마시면 골 때리는' 질나쁜 막걸리의 출현에 정작 부채질을 한 것은 어이없게도 막걸리 양조업자들이었다.

양조장 규모가 커지고 배달구역이 넓어지면서 여름철 땡볕아래 반나절이면 식초처럼 쉬는 막걸리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해 협회전체가 단합해 알콜도수를 4도에서 6도로, 다시 6도에서 8도로 높여나갔다. 일부 악덕 업자들은 한술 더 떠, 막소주도 모자라 방부제까지 슬쩍슬쩍 섞었다.

결국 1980년대초 '대한민국 국민주가 막걸리에서 소주로 바뀌었다'는 국세청의 공식발표가 나오기에 이르른다.

물론 막걸리 맛을 훼손시켰다는 이유 만으로 애주가들이 박정권을 탓할 수는 없다. 희석식소주는 '단군이래 5000년 가난을 물리친 박정권의 경제개발 정책'과 궤(軌)를 같이 해왔으며, 요즘도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술이기 때문이다. 역사(歷史)는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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