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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3일 밤, 콜로라도에 '단비' 내린다

[발행인칼럼] 김 영 종

단장의 미아리 고개'

' 단장의 미아리고개'-. 슬프기 짝이없는 노래다.

시대배경은 6.25전쟁당시, 미아리고개 너머로 후퇴하는 인민군에게 끌려간 남편을 애절하게 그리는 상황. 반야월작사 이재호작곡, 1956년 이재연이 불렀다. 특히 노래 중간에 "살아만 돌아오세요, 네? 여보-"로 이어지는 대목에선 와락 눈물이 솟구칠 정도다. 그렇다면 이 노래를 송대관이 불러도 과연 슬프게 느껴질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다.

송대관도 젊은날 이에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어느날 중국음식점에서 그는 해괴한(?) 장면을 목격한다. 대학생 예닐곱명이 술에 취해 젓가락을 내리치며 "철사줄로 두손꽁꽁 묶인채로~앗싸!앗싸!~살아만 돌아오소~ 앗싸!앗싸~"하며, '~미아리 고개'를 부르고 있었는데, 애절하기는 커녕 너무너무 신나 어쩔줄 몰라하는 표정들이 사뭇 가관(?)이었다. 곧장 모 대학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님, 엄청 슬픈 노래를 대학생 애들이 무척 신나게 부르는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겁니까?"

"원래 우리민족에겐 슬픔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슬기가 몸안에 배어 있어 그런 것같네."

"네??-???" 이게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린가? 정답은 며칠후 작곡가 안치행에게서 나왔다.

" 그건 4박자라서 그런걸세. 신명은 박자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노래말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거라네. 쿵짝쿵짝~쿵짜작쿵짝~어때? 신바람 나지? 이제 아시겠소?"

송대관은 그 후 '차표한장' '네박자' '유행가' 등 4박자 곡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소위 '트로트의 황제'로 성장한다.

여기서 잠깐 뒤돌아 보자. 1920년대 이전 민중이 부른 것은 판소리와 민요였다. 그러던 어느날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탄생했다. 1926년도다. 가히 혁명적 변화였다. 곧이어 김서정 작사작곡의 '낙화유수'(1929년. 일명 강남달), 이애리수의 '황성옛터'(1932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1935년)이 잇달아 등장했다. 이어서 남인수, 신카나리아, 김정구, 고복수, 황금심등이 등장, 한국가요사에서 '대중가요'라는 새 장르를 열고, 무서운 속도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이 한국땅에 소위 '유행가'를 몰고 오기 시작한 것이다.

엔카(演歌)와 '뽕짝'

그러나 초창기 이 새로운 장르는 아쉽게도 많은 부분에서 일본 엔카(演歌)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했다. 엔카는 메이지 유신 무렵 유행했던 일본 전통민요 가락으로 일제 식민시절 한국 땅에서 소위 '뽕짝'(트로트)으로 진화했다. 60년대 남진의 '가슴 아프게',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로 이어지기 까지 왜색이 도처에 배어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까지를 한국 대중가요사의 '제 1기'라고 끊어보자.

'제 2기'는 6.25 전쟁을 거치면서 상륙한 미국 음악과 통기타의 등장이다. 지금의 40~60대들은 국민학교 때는 엔카 풍의 애잔함이 근저에 깔린 노래들을 부르며 자랐다. '푸른하늘 은하수' '따오기'등엔 그런 슬픔이 배어있다.

그런데 중학교에 진학하자 마자 갑자기 말을 타고 달리는 듯한 리듬과 박자로 확 바뀐다. '올드블랙조우' '멀고 먼 앨러배마' '켄터키 옛집'등이 음악교과서에 쫙 깔린다. 일본 음악과 미국 음악의 '권력이동' 시점이다.

통기타는 60년대 말 미국을 통해 한국 땅에 상륙해 70~80년대에 전성기를 맞는다. 소리가 작아 합주엔 끼지 못하는 것이 단점인 반면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불릴만큼 다양한 화음을 낼 수 있다. 음색이 경쾌한 이 악기 하나면 해변가에 수십명이 둘러앉아 밤새 손벽치며 놀 수가 있다. 양희은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등이 그걸 둘러메고 '청바지 생맥주 시대'를 열었다. 최인호의 '고래 사냥' '바보들의 행진'이 가세했다.

'제 3기'는 90년대부터 요즘까지-. 요란한 전자음과 함께 댄스뮤직이 무대를 휩쓸고 있다. 80년대말 8등신을 앞세운 김완선이 어느 날 갑자기 '정도 이상'으로 흔들며 TV화면에 뜨는가 싶더니, 90년대 초 서태지에 이르러 컬러 TV화면을 완전 장악한다. 그리고는 '노래'보다 '몸짓' 우선이라는 옆길로 진화중이다. 여기까지가 편의상 3토막으로 나눠본 한국 대중가요사다.

그렇다면 한국가곡은 어떤가? 대중가요와 탄생및 개화시기는 비슷하지만 그 배경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일제 식민시대-, 민족적 사명을 고취시키는 명시(詩)에 서정적 선율이 얹힌 예술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초 발표된 한국최초의 가곡 홍난파의 '봉선화'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잠깐 대중가요와 가곡의 차이점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곡'과 '가요'의 차이

대중가요는 우선 음악과 선율을 만들어놓고 그 분위기에 맞는 가사를 찾아 엮는게 보통이다. 때문에 작곡가가 왕이다.

반면 가곡은 시(詩)가 먼저다. 그 시를 음악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려고 작곡가들은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등 무진 노력을 기울인다.

또, 가요는 대중성, 오락성,통속성,상업성에 기초를 두는데 반해 가곡은 예술성과 심미성에 가치를 두고 만들어진다.

따라서 가요는 모든 가능한 코드가 다 사용되지만 가곡엔 코드진행이나 선율사용이 매우 절제돼 있다. 가곡을 오래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이유는 선율이 이처럼 절제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가곡은 이처럼 '민족 혼의 추구'에서 출발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 현대감각을 지닌 '선구자' '제비' '가고파'등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있는 품격높은 순수예술가곡들 즉, '내마음' '수선화' '동심초' '산유화' 등은 1940~50년대 작품들이다.

또 하나, 가요는 유행만 타면 일단 성공이라고 보지만 가곡엔 '영혼을 깨우는' 소중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그래서 가요는 연예.오락(Entertainment)으로 분류되고 가곡은 예술(Art)로 분류된다. '독일가곡'이든 '이태리 가곡'이든 어느 민족에나 자존심이 걸린 소중한 문화자산으로 존중받고 있다.

'민족혼'을 2세들 가슴속 깊숙이

청소년 시절, 누구나 한동안은 가곡에 심취하곤 했다. 그 즈음 청운의 푸른 꿈도 함께 펼쳐졌다. 소풍 때, 학생들의 박수요청으로 "노래 한 곡조"를 강요받은 담임선생님들은 잘 못부를 망정 으레 '그 집앞' '바위고개' '봄처녀'등을 불렀다. 제자들 앞에서 품격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였다.

미국 땅에서, 요란한 전자음이 난무하는 미국 대중음악 속에서 자라나는 우리 2세들에게 한국의 고급문화를 꼭 알려줄 필요가 있다. 정체성에 대한 100마디 분석 교육보다 그냥 가슴으로 깊이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때론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흔히 "콜로라도 한인사회에 문화는 없고 경제만 있다"는 말들을 한다. 이런 가운데평생 가곡에 매진한 김정권 테너를 비롯, 전문 성악인들이 출연료 없이 수준높은 문화공연을 선사하겠다고 나선 것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메마른 사막에 내리는 '단비'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한국인의 정체성, 민족 혼을 우리 2세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해 애쓰는 콜로라도 통합한글학교에서 이같은 행사를 마련해 더욱 뜻깊다.

청중들이 공연장을 가득 메워야 한다.아낌없는 박수를 쳐줘야 한다. 한인사회의 '자존심'이 이 속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오는 11월23일 밤, 덴버 중부장로교회안은 전문 성악인들이 내뿜는 열창으로 물결치고, 청중들은 향수와 감동과 희망에 흠뻑 휩싸일 것으로 기대된다. 설레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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