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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 에세이]히틀러의 청년시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4)는 오스트리아의 브라우나우라는 강변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관원이어서 그가 승진함에 따라 아돌프는 세관이 있던 여러 강변도시들을 전전하며 자랐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무려 23세 연하 육촌이었고 그의 셋 째 부인이었다. 부부 사이에 6남매가 있었으나 아돌프와 여동생 한 명만이 성인으로 성장했다. 아버지가 65세로 사망하자 어머니는 재산을 정리하여 린츠시의 한 아파트로 이사 갔다. 여기서 어린 히틀러는 10대를 보냈다. 일정한 직업도 없이 그림 그리고 동네를 산책하며 가끔 오페라를 관람했다.

어려서 그는 전형적인 마마보이였다. 아버지는 장대하고 콧수염을 휘날렸으며 제복을 입은 이 중늙은이(히틀러는 아버지가 50살 때 태어났다.)는 항상 위풍당당했다. 이에 비해 어머니는 늘 겸손하고 순종했다. 그는 일생 어머니와 견줄만한 훌륭한 여자를 만난 적이 없다. 학교 성적은 좋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던 사생에서도 별로였다. 학교에서 하는 일이란 선생님들을 귀찮게 하고 장난을 하고 이상한 질문을 해서 당황시키면서 괴롭혔다. 아버지를 싫어해서 그랬는지 그는 어떤 권위적인 존재에도 반항하고 미워했다. 이것은 청소년기 ‘반대 저항 장애’(Oppositional Defiant Disorder)에서 자주 보는 행위다.

그는 (정규고등학교가 아닌)기술학교에서도 성적이 낮았다. 다른 학교로 전학해서야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시험을 치룬 뒤 그는 만취상태로 행패를 부렸다. 다음 날 학교에 가 보니 그의 졸업장은 취소되어 있었다.

그는 우울한 청년이었다. 선생을 골탕 먹이고 가끔 열정이 솟아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그는 수줍고 울적했다. 친구들도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아 외톨이 신세였다. 어떤 사람은 그가 태어날 때 고환 한 개가 음낭에 내려오지 않아서 내성적으로 되었다는데 그것은 근거를 댈 수 없는 그저 한 개의 가설일 뿐이다.



1906년 그는 처음으로 비엔나에 갔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 예술품들에 매혹되어 미술 아카데미에 지원했지만 실력부족으로 두 번이나 낙방했다. 그래서 건축 학교에 지원했지만 이번에는 고교 졸업장이 없어 자격을 잃었다.

다음 5년간 그는 비엔나에서 부랑자 같은 생활을 했다. 손수 그린 포스트카드를 팔아 끼니를 잇고 술주정뱅이, 약 쟁이, 건달들과 어울렸다. 그런데 그가 일단 남들과 토론을 시작하면 가슴 속에 지녔던 생각들이 터져 나왔다. 그는 모든 민주주의 형태를 의심했고 지식인을 불신했으며 자본주의를 미워했다. 유태인들과 공산주의, 그리고 슬라브 민족을 경멸했다. 그들은 ‘인간 이하’ 존재였으며 순수한 독일인들로 구성된 세상을 이상향으로 꿈꾸었다.

뮨헨으로 이사 와서 일 년 반 동안 그는 다시 건달생활을 했다. 방구석에서는 포스터나 선전물을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었다. 자주 방세가 밀려서 여주인은 그를 부랑자로 보았다.

1914년 일차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독일제국 군대에 입대했다. 국수주의 사상에다가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에서였다. 전쟁기간 대부분을 연락병으로 일선에서 복무했다. 1918년 가을 뮨헨으로 돌아왔는데 사회는 극도로 혼란하고 많은 정파들이 끊임없이 정쟁을 일으켰다. 1920년 그는 제국 육군에 다시 소집되었다. 그는 군 정치부에 소속되었는데 그의 임무는 군대에 해로운 정파를 찾아내고 군인들에게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위험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독일 노동당에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고 무능한 우파 정당이었다. 그는 군 명령에 의해 집회에 참석했다.

그는 특유의 선동 기술을 이용해 당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는 연단에서 모든 독일인은 하나가 되어야 하고 베르사유 조약은 폐기되어야 하며 중앙집권제의 정권을 주창했다. 1920년 여름 그는 독일노동당의 당명을 나치(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당으로 개명했다. 1923년 가을, 정권획득에 급급한 나치당은 뮨헨에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히틀러는 사형대신 5년 징역형을 받았다. 실제로는 단지 13개월만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의 이름은 전 독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는 옥중에서 집필을 시작하여 1925년에 ‘Mein Kamph'란 책을 발표했다. 많은 독일 사람들이 이 책에 열광했다. 그들은 히틀러의 ’투쟁‘을 자신들의 투쟁으로 믿었다. 책을 보면 모든 불만과 고통의 원인에는 자기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 남들에 의한 결과라고 믿게 했다. 히틀러가 말하는 ’진실‘이 바로 자기들의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자세히 읽어보면 역사적으로 불확실한 것들, 신화, 애매한 사실, 그럴 듯 진실로 보이는 것들, 계속 반복되는 선동과 거짓들로 가득 차 있어서 이것이 심한 과대망상증(Megalomania)환자가 세계를 정복하려는 위험한 매스터 플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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