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정신건강 에세이] 히틀러의 장년시대

히틀러는 자신이 당내 세력을 장악했다고 판단하고 나서 자기를 ‘우리들의 영도자’(Unser Fuhrer)로 불러 달라고 요구했다. 요구는 관철되었다. ‘우리들의 영도자’를 줄여 부르면 그냥 ‘영도자’(Der Fuhrer). 당의 영도자는 물론 전 독일의 영도자 더 나아가면 전 세계의 영도자를 의미하기도 했다.

유태인들에 대한 악감은 한이 없었다. ‘Mein Kamph'에서 곳곳마다 유태인들에 대한 규탄을 멈추지 않았다. 유태인들은 민주주의, 자유주의, 언론 자유 등을 주장하는 사악한 집단이다. 그는 항상 대중은 무식하고 우둔하며 시대정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유태인들은 더러운 민족으로 ’순수 아리안‘민족보다 하위 민족이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신체적으로까지 혼혈정책을 통해 순수 아리안 혈통을 파괴하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체계적으로 말살되어야 한다. 그런 소신으로 인해 그는 살아 있을 때 6백만의 유태인들을 처형해 인종청소를 시도했다.

히틀러에게 아리안 족이란 유태계라 아닌 코카지안인데 그는 아리안은 인도-유러피언 언어를 쓰는 민족들로 한 계통이라고 잘못 이해했다. 그가 유태인 못지않게 미워하던 슬라브족들로 언어학상으로는 인도-유러피언이기 때문이다.

1924년 감옥에서 나와 1933년 독일의 전권을 장악하기 까지 그는 당의 사업에만 전념했다. 1927년 법원이 정치적 발언을 허락할 때까지 그는 주로 당 기관지를 이용하여 심한 반정부 선동을 일삼았다. 그 사이 나치당에서 중추 역할을 할 괴벨스, 괴링, 스트라서, 룀 같은 인물들이 그 밑에 모여들어 진을 치고 조언을 해 주며 앞으로 당이 나아갈 지침을 논의하기도 했다. 범죄성과 무자비함은 그들의 공통점이었다. 히틀러가 약점을 보이면 다른 사람은 그 약점을 보완했다. 그의 허약한 몸매, 웃지 않는 찌푸린 얼굴, 창백한 안색은 그들 중 어떤 이의 뛰어난 이목구비로 대신했다. 그들은 히틀러의 부침 함께 했고 궁극적으로 독일의 멸망까지 도운 셈이다.



히틀러 가계에는 근친상간적인 요소가 가끔 눈에 뜨인다. 우선 히틀러 부모는 23세나 나이 차이가 있는 6촌간이다. 1928년 그가 어떤 산장에 머물고 있을 때 의붓 누나가 가정 일을 돌보았다. 그녀는 과부로 두 딸이 있었다. 히틀러는 그들 중 방년 20세인 겔리에 반했다. 그는 어디를 가나 그녀를 동반했다. 3년간이나 그녀와 결혼하자고 졸랐다. 겔리는 삼촌을 좋아했지만 깊게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직 젊어서 음악을 포기하기 싫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녀가 비엔나에 가서 음악공부를 한다는 것이 싫었다. 1931년 그가 함부르그로 떠나는 날 겔리에게 자신의 태도를 명확하게 밝혔다. 다음 날 그녀는 자신의 심장에 총을 쏘아 자살해 버렸다.

히틀러는 슬픔에 젖어 자살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여인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가 에바 브라운과 오랫동안 사귀고 동거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 사랑은 겔리에 대한 것만 못했다. 브라운과 결혼한 것은 그가 자살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그는 산골 별장 리셉션 홀에는 커다란 겔리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그 밑에는 항상 신선한 꽃으로 매일 갈면서 장식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시드는 것은 죽음의 상징. 그래서 신선한 꽃은 겔리의 자살을 부인하고 또 자살을 유도한 자신의 죄책감을 달래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는 항상 두 여자의 사진을 지니고 다녔다. 어머니와 겔리 뿐이었다.

1920년대 후반 독일의 경제는 말이 아니어서 인플레이션이 천정을 모르게 뛰고 실업 율이 최고에 달했다. 심한 불황에 빠졌다. 새해에 들어서면서 미국 증시가 폭락하고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그 여파는 전 세계에 미쳤다. 히틀러는 위기를 이용하는데 익숙했다. 우선 희생양이 필요했다. 유태인들과 공산주의자들. 히틀러 자신은 위기에 빠진 독일을 구하는 구원자.

1930년 선거에서 대승했다. 나치당은 2년 전보다 8배나 많은 투표수를 받았다. 권력에 대한 욕구가 심했지만 2년 전 쿠데타의 전철을 밟지 않고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1932년 선거에서 그는 전 국민의 37.4%의 지지를 받았다. 이 때 국민들의 지지만이 아니었다. 부자와 대 기업가들의 지지도 받았다. 이런 사실은 당시 노쇠했던 힌덴부르그 대통령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히틀러는 수상 직을 요구했고 대통령은 이를 수락했다. 1933년 1월 30일 그는 대망의 수상 직에 오른 것이다.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