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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 에세이] 한국의 식인기록

한국에서의 식인문화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중종실록]을 보면 중종 21년부터 허벅지의 살을 도려내고 손가락을 끊어 효도하는 형태 말고도 직접적으로 인육을 약으로 삼은 행위가 광범위하게 퍼져있었으며 [선조실록]에 의하면 선조 9년에는 산 사람을 죽이고 생간을 꺼내 판 혐의로 체포된 기록도 있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7년 1월 사헌부는 “기근이 심해 심지어 사람 고기를 먹으면서도 편안히 여기고 괴이함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임금에게 보고했다. 같은 해 3월의 어전회의에서는 더 심각한 상황이 거론되었다. 판중추부사 최흥원은 “굶주린 백성들이 근래 더욱 많이 사망해 그 고기를 나누어 먹고 백골이 성 밖에 쌓으니 성의 높이와 같다.”라고 보고했다. 병조판서 이덕형은 “부자와 형제까지 서로 잡아먹고 있다.”고 말했다.

의병장이었던 조경남은 ‘난중잡록’에서 “백성 생활이 곤궁하여 큰 소가 쌀 3두에 불과하고 세목 값도 곡식 몇 되가 채 되지 못하며 의복과 여러 물건들이 팔리지 않으니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여자와 고아는 바깥출입을 못하고 있다.”고 적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국왕 선조는 “백성이 아래에서 원망해도 내가 듣지 못하고 하늘이 위에서 분노해도 내가 알지 못한다. 이제와서 후회한들 어찌 되돌릴 수 있으랴”라고 신민에게 공개 사과하는 ‘애통교서’를 반포해 백성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애총교서’보다 필요한 것은 “반드시 조치를 취해 살 길을 열어준 후에야 서로 죽이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러지 않으면 금지시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병조판서의 말대로 백성을 살리는 정책이었다.



임진왜란 때 1592년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임금 선조는 의주까지 피신했고 다음 해 정월이 되어서야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의 도움으로 평양성을 탈환했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은 ‘과거를 징계하며 장래를 조심한다.’는 뜻의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했는데 전란에 시달린 백성들의 참상을 그대로 기록했다. 1년 만에 서울이 수복되어 임금이 환궁했다. 성안의 백성들은 백에 하나도 성한 사람이 없었고 굶주리고 병들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중앙과 지방은 몹시 굶주리고 또 명나라 군사에 대한 군량 운반에 지쳐서 늙은이와 어린이들은 도랑과 구덩이에 쓰러져 죽고 장정들은 도둑이 되었다. 거리마다 인마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게다가 겹쳐서 전염병이 거의 다 죽어 버렸으며 심지어는 부자와 부부가 서로 뜯어먹기에 이르렀고 길가에 버려진 해골들은 우거진 숲처럼 쌓여있었다.
식인 행위는 20세기에 들어 한반도에서 다시 나타났다. 농업정책의 실패로 북한에서 발생한 ‘고난의 행군’(1994-1998) 시기였다. 1998년 북한을 방문했던 중국인들이 식육 행위를 보고했다. 2006년에는 북한 주민들이 인육을 팔고 먹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2012년 봄에도 수만 명 규모의 아사자가 발생했으며 그 원인은 북한 정부와 조선인민군에 의한 식량 강탈에 있었다. 굶주려 정신이상을 일으킨 부모가 자식을 솥에 넣어 삶아먹고 잡혀 죽은 사건이나 인육의 밀매, 유통 등의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남한에서 발생한 식인 행위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띄운다. 1994년 소위 ‘지존파’ 일당 6명이 시민 5명을 살해한 이유로 구속되었고 사형되었다. 이들은 부유한 시민들을 납치해 그 가족으로부터 돈을 뜯어내려고 했다. 부자에 대한 악감이 너무 커서 그들의 인육을 먹었다고 했다. 사형을 집행했을 때 이들 중 한명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2011년 만주에 사는 조선족들이 사산한 태아를 가루로 만들어 캡슐에 넣은 후 한국에 밀수입하던 것이 세관당국에 의해 적발되었다. 이들은 태아를 작은 조각으로 자른 후 난로 위에 말린 다음 가루로 만들었다. 이런 캡슐을 정력 강장제나 회춘제라고 해서 팔았다. 한국의 세관이나 경찰, 보건 당국이 단속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대량으로 나돌게 된 인육 캡슐을 적발이 쉽지 않았고 1정에 3만 원 정도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이 경우는 미라 가루를 만병통치약으로 복용했던 고대 이집트인들의 행위와 유사하다.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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