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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열며] 이불 빨래

위 선 재 / 독자·웨스터체스터

지난 일요일 볕이 좋길래 이불 빨래를 해왔다. 겨울 두꺼운 이불은 집안의 세탁기에서 빨 수 없어 들고 나가 바깥의 론드리맷에 가서 빨아야 하는데 번거로워서 미루어 두었던 일이다.

오늘부터는 기온도 올라가고 볕도 나기 시작한다는 일기 예보에 창문을 열다가 두꺼운 겨울 이불 대신 상큼하게 깔아둔 여름 홑이불이 오늘 햇볕과 산들바람에 뽀송뽀송 마를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까지 개운해지는 것 같다.

쨍한 햇볕이 내려 쬐고 맑은 바람이 부는 때를 놓치지 않고 철 따라 이불을 바꾸어 준 것 뿐인데 마뜩하고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가 대견스럽다. 이제 한여름 동안 쾌적하게 시원스럽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늦가을이 되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빨아다가 햇볕에 그 속까지 바짝 말려 두었던 포근한 겨울 이불을 꺼내 덮을 수 있을 것이란 것에 생각이 미치면 벌써부터 즐겁고 내가 대단히 잘 살고 있는 것 같고 누군가 '참 잘햇어요' 하고 칭찬해 줄 것만 같다.



때맞춰 이불을 바꾸어 주는 이런 사소한 일이 이리 뿌듯하고 만족스러운 것은 단지 내가 주부로서의 역할과 본능에 충실했다는 그런 자각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빨래를 말릴 때 쓸 수 있는 따사로운 햇볕과 맑은 바람을 공짜로 맘껏 가져다 쓸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마음까지 풍요로워져 마치 부자가 된 것 같고 철을 놓치지 않고 씨를 심고 모내기를 해 놓은 농부처럼 자연의 섭리에 순응해 살고 있는 듯한 그런 깊은 안도감까지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엄마가 두꺼운 겨울 솜이불들을 모아서 가까운 계곡으로 빨러 가는 길을 따라갔던 기억도 딸려온다. 이불을 빠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변의 너럭바위들 위에 빨아 놓은 이불들을 펼쳐 널어 햇볕과 바람에 다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걷어 오는 일이었기에 하루 종일 걸리는 일이었다. 계곡까지 이불을 지고 나르는 길, 빨래를 하는 일들이 엄마에게 번거롭고 힘든 일이었을지 모르나 나는 그것을 즐거운 소풍길로 기억하고 있다.

빨래가 마르는 동안 평소보다 좀 더 풍성한 도시락을 꺼내 먹고 시원한 계곡물에 몸을 담그거나 물장구를 치며 더위를 식혔고 계곡물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신발짝으로 떠다 담으며 놀았다. 너럭바위 위에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 해바라기를 하고 지나가는 맑은 바람을 느끼던 기억이다.

그런데 그 빨래를 하러 가던 날이 엄마에게도 노역의 연속이기만 했을까? 살림에 찌든 엄마도 빨래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은 야생화들과 하늘에 무심히 떠가는 구름에 시선을 주고 오랫만에 한가하게 쉴 수 있지 않았을까? 미루고 미루던 두꺼운 이불 빨래가 큰일이기는 했겠지만 그 수고스러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그동안 절어 있던 때를 씻어내고 그 속까지 바람에 바짝 말렸기에 가벼워진 이불처럼 삶의 무게와 마음의 짐도 덜어내고 씻어 오던 길이 아니었을까? 막 빨래 해 온 이불에서 맡아지던 향긋한 바람의 냄새도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것만 같다.

나도 이제 주부가 된 지 수십 년이 되어 간다. 이불을 햇볕에 말리면서 주부다운 살림의 기쁨과 보람을 맛보고 있다. 삶의 기쁨과 보람도 여기서 크게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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