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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열며] 소소한 가을 행복

이원경 / 자유기고가·뉴저지 거주

집앞 현관 앞에다 활짝 핀 노란 국화 화분을 사다 놓았다. 집을 들락거릴 때마다 내 눈길 한번씩 붙잡는 국화는 유명시인의 주인공으로도 손색이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예전 같지 않게 가을꽃이 좋아진다. 차가운 가을녘에 꽃을 피운다는 반전이 희망으로 보여져서 인가보다.

국화 몇 송이를 꺾어서 재활용 유리병에 넣어 부엌 테이블에 놓으니 마음이 온통 꽃밭이다. 시골 농장에서 6달러쯤 주고 산 국화 화분의 몇 송이 꽃이면 몇 센트도 안 된다. 그걸 꽂아두고 마음 촉촉해하는 내 뇌구조가 얼마나 값싸게 감동하는지를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평소 존경하는 L선생님이 이사를 하신다며 짐을 줄여야 하니 원하는 책이 있으면 가져 가라는 연락이 왔다. 워낙 책을 많이 읽으시고 글을 쓰시는 선생님의 서재 답게 웬만한 도서관을 방불케 했다. 그 많은 책들도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에게 선택 받고 남은 책들일 터였다. 현대문학의 시조가 되는 시인들의 시집도 고르고 평소에 보고 싶었던 책들을 골랐다. 사실은 나도 작년에 이사하면서 많은 책을 버리고 또 물건을 늘리지 않겠다고 작정한 터라 가기 전까지는 꼭 보고 싶은 몇 권만 가져 와야 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책을 보니 욕심이 났다. 그 많은 이야기들이 궁금해서 읽어야 할 것들 투성이었다. 그런데 그 중 오래 전부터 갖고 싶었던 책을 하나 발견했다. 전에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책이었다. 여행 사진과 함께 잔잔한 글이 있는 산문책인데, 소장하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어서 다음에 한국에 가면 구입을 해야지 했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만나니 그 설레임과 짜릿함은 철 지난 코트 호주머니에서 발견한 현금 같았다.

집에 와서 내 책과 그 책들을 섞어 마치 내 책장 안에서 오래 있었던 것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장르별로 나누어 서로 낯가리지 않고 친구처럼 잘 지내게 해주었다. 언제든지 나는 책장에서 책 한권 뽑아들고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마치 어느 여행지의 북 카페에 들른 것처럼, 그래서 내 것이 아니어서 돌려줘야 하는 마음으로 낯설게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발견의 기쁨을 안겨준 한 권의 책은 표지를 랩으로 싸서 사랑받아 마땅한 식탁 한 곳에 놓아두었다.

어렸을 때 외갓집에서 놀다가 굴러다니던 책을 하나 찾아서 읽은 적이 있다. 표지도 없고 앞 장은 떨어져 나가서 아마도 버리려고 놔둔 책이었던 것 같다. 글씨가 작아서 어른들 책이라고 생각했다. 심심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제목을 알 수도 없는 책을 품에 안고 오랫동안 간직했다. 시간이 지나고 그 책 제목이 소공녀라는 것을 알게 됐다.

가끔은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두고 가기 정말 아까운 것이 무엇인가 생각을 해본다. 자식과 혈육이란 생물학적인 것을 배제하고 말이다.

난 우습게도 책이다. 감동적이고 좋은 책들을 읽지 못하고 떠난다는 게 가장 슬플 것 같다. 그것들은 나에게 위로자이고 스승이고 동료이다. 가끔 인간사로 지칠 때, 괜찮다고 내게 힘을 준 절친이기도 하다.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생각했을 때 만난 불교 서적 한 권이 나를 보듬어 준 적이 있다. 거기서 나온 원적외선 파장의 따뜻하고 밝은 빛이 굳은 육을 만들어서 벼랑 안쪽으로 슬며시 밀어 들여보내 주었다. 이렇게 이쁜 짓하는 내 책장을 어린 시절의 소공녀처럼 조용히 안아주었다.

물건을 늘리지 않겠다고 작정한 내가 오래된 시집과 묵은 책, 그리고 국화 몇 송이로 이렇게 달착지근한 가을을 보내고 있다. 난 분명 값싸게 가는 뇌구조를 지녔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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