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타향도 아닌 타국 생활

이민수기 공모 수상작-특별상
이숙경

매일 새벽 5시면 자동으로 일어나면서도 36년째 습관적으로 알람을 맞춰 놓고 잠에 든다. 예전에는 별 보고 나가서 별 보고 집에 들어 왔는데 요즘에는 오후 5~6시면 집에 온다. 꿈만 같이 환할 때…

뒤뜰이 예쁘고 편안한 내 집과 나의 일터는 걸어서 3분 거리. 오늘도 200여 종류의 반찬을 날씨와 요일에 따라 만들어 판매를 한다. 더운 날은 시원한 음식을, 추운 날은 따뜻한 음식을,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그리고 화요일은 국 종류를 많이 만들어 단골 고객들에게 일주일 치를 함께 사서 먹을 수 있게 저렴하게 판매를 한다. 이렇게 클로스터에서 17년째 반찬 집을 하고 있다.

한국 IMF인 1999년에 촌티가 풀풀 나는 남편과 나, 5학년인 아들, 3학년인 딸과 함께 여행 비자로 와서 눌러 앉았다. 6개월 후면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될 터인데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생긴 듯하다. 매몰찬 타국의 삶은 모른다고 봐 주질 않았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고, 빽도 없으니 열심히 일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편은 어디서 일을 하든 적응을 못하고 중도에 그만 두기를 반복 하고, 평생 농사만 짓던 남편은 미국 생활이 어렵단다. 혼자 벌어서는 못사는 나라 미국, 조금 가져온 돈은 바닥이 나고 나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 갔다. 이러다 열심히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짐이 될까 두려웠다. 미국 온 지 1년 손들고 한국으로 다시 갈까 할 때 아이들은 조금씩 의사소통이 돼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을 보며 "저런 아이들을 어떻게 다시 데리고 한국을 가나? 엄마인 내가 견뎌보자 타향도 아닌 타국인데 당연히 어렵지" 마음 먹으며, 적은 돈으로 남편과 함께 할 수 있는 장사가 없을까 생각하며 매일 매일 신문을 열심히 보았다. 마침 클러스터에 반찬 집이 나와서 여동생에게 돈을 융통하여 가게를 인수해 장사를 시작했다. 콩장이나 하고 김치나 하면 되는 줄 알았던 반찬 가게. 그러나 들어 보지도, 먹어 보지도 못한 음식을 주문하면 요리책을 보며 밤새 만들어 먹어보고 안될 것 같으면 다른 집에 주문하여 손님에게 내어주기도 하고 내가 만든 음식은 아까워서 먹기도 하고 버리기를 수백 번, 열심히 노력해서 일년 만에 팰팍에서 클로스터로 이사를 왔다.

가게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무리를 해서인가 보다. 다리가 아파 서 있을 수가 없어 주방장을 구하고 물리 치료와 한의원을 오가며 치료하고 쉬니 3개월 후에 가게를 다시 나갈 수가 있었다. 그 3개월이 나에게는 넘어진 김에 쉬는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오면 설 수가 없으니 의자에 앉아서 떡볶이도 해 주고 피자도 만들어서 함께 먹으며 아이들과 이야기도 하며 쉬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아이가 "엄마 나 요즘 너무 좋아. 집에 오는 게 행복해. 옛날엔 별루였는데" 하며 나에게 안긴다. 가슴이 아프다. 가슴 아픈 게 이런 이런 느낌 이구나 하면서 "그럼 엄마 계속 아파야 하는데" 그러자 "엄마 그건 아니구" 하며 내 가슴을 친다. 우린 서로 안고 울었다. 다리가 낫고 주방장은 일을 그만두고 나는 아이들을 뒤로 한 채 가게에서 나의 모든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지금 내 가게는 아주 작고 더워서 여름에는 2시간이면 음식이 상하여 판매하고 또 만들어 판매하기를 반복 하니 일이 곱절로 힘이 들었다. 계약이 만료되어 다행 반 걱정 반 일 때 건축 일을 하는 동생이 가깝고 넓은 장소에 음식점 허가와 내부 공사를 도와 주어서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나의 두 번째 가게로 이전을 했다. 장사가 잘 돼서 직원도 1명에서 3명으로 늘었다. 그런데 직원을 팰팍에서 라이드를 해야 했다. 아침엔 내가, 저녁엔 친정 아버지가 도와 주셨다. 운전이 서툰 나는 가게에 도착하면 다리가 후들 거려서 10여분 동안은 앉아 있어야 했다. 운전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고민 끝에 구인난에 침식 제공이라고 냈더니 조선족 아주머니 3명이 왔다. 중국에서 어렵게 온 분들이라 생활력도 강하고 열심히 일을 했다. 나를 포함해서 여자 4명이 일 벌레처럼 열심히 했다. 주말이면 아이들은 가게 일을 도왔고 대학 가서도 둘은 교대로 가게 일을 도와 주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마웠다. 아주머니들이 아프면 아들이 병원도 함께 다녀오고 한 집에서 한 가족처럼 지냈다.

아들이 대학 다닐 때 쯤 "엄마 아무리 바빠도 30분만 외출하자"며 나를 차에 태우더니 10분 후에 내린 곳은 허드슨 강가였다. 약간 비릿하면서 상큼하고 주위는 가을 단풍 옷으로 뽐내고 있다. 아!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난 울고 있었다. 서러운 건지 감사한 건지…

그렇게 7년이 흐르고 가게로 신청했던 영주권이 3년이면 나온다더니 11년 만에 나온 영주권을 쥐고 울었다.

마음 고생 몸 고생 다 시키고 아! 그래도 감사하지… 몇 개월만 늦었어도 아들은 영주권을 못 받고 한국으로 군대를 가야 했다.

이젠 쉬어 가자 할 때 남편은 한국을 다녀온다 하고 가더니 영영 주저 앉았다. 미국이 그토록 싫었나 보다. 나도 미국 생활이 쉽지는 않다. 남편 없이 혼자 아주머니들과 가게를 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오는 아들. 아빠가 없으니 꼭 와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나 보다. 다음 해 여름 대학 졸업을 한 아들에게 가게를 맡기고 2주간 한국에 다니러 갔는데 다른 나라 같았다. 한국에서 노후를 보내려 한 나의 꿈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한국 온 길에 건강 검진을 받아보았는데 검진 결과 내 머리에 탁구공 크기의 혹이 있는데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혹이 자라면서 다른 신경을 눌러 위험하다고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며 입원 수속을 하라 한다. 12년 전부터 예쁘게 쓰던 글씨도 잘 안 써지고 걸을 땐 술 취한 사람 같고 출렁거리는 것을 보면 어지럽고 운전도 어렵고 한 것이 혹 때문이었단다. 어쩌나 아직 딸이 대학을 다니고 있는데…

수술 하자는 말을 뒤로 하고 가게를 정리하러 미국으로 왔다. 아이들과 상의를 하려는 데 아들이 "돈이 있어야 엄마 수술비도 대고 건강 회복 되는 기간 동안 생활비도 마련 해야 하니 내가 가게를 운영 하겠다"하며 음식 레시피를 가르쳐 달라는 말에 가슴이 먹먹 했다. 나는 마음 먹었다. "그래 일년만 신세지자" 하고 한달 동안 모든 것을 자세히 알려주고 수술을 하려고 혼자 조용히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명은 하나님의 뜻 순리에 맡기니 마음이 깃털처럼 가볍다. 생각해 보니 억울할 것도 없다. 가난했기에 참 열심히 이것저것 많이도 경험하고 나름 열심히 산 인생 같았다.

2번의 뇌 수술 후 6개월 만에 건강을 회복하여 살아서 아이들 곁으로 왔다.

아들은 아주머니들과 가게를 잘 하고 있었으나 나의 바램은 건강이 회복 되었으니 아들은 본인의 꿈을 펼치길 바랬으나 아들은 걱정이 되어 내 곁을 떠날 수가 없나 보다. 혹여 내가 아들의 발목을 잡지는 않는 걸까? 나는 싫었다. 내 아들은 본인이 계획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아들은 오히려 나를 설득 시켰다. 그리고 1년 후 우리는 세 번째 가게로 이전을 했다. 가게 규모도 커지고 직원은 10여명으로 늘고 작업 환경도 좋아졌고 이런 일은 내 곁에서 힘이 되어준 사람들이 참 많아서 이루어진 것이다. 힘이 되어준 아이들, 어려운 일 생기면 해결해준 남동생, 마음으로 응원해준 고객들, 수술 할 때 자기 가게처럼 지켜주신 아주머니들 모든 이들에게 정말로 정말로 고맙다.

지금 나는 손녀딸 보는 재미와 유기농 재료를 구해 몸에 약이 되는 좋은 음식 만드는 데 재미를 내고 있다. 귀한 재료로 만드는 나의 음식을 기다리는 가게 카톡 그룹 손님이 280여명. 부자의 기준은 알 수 없지만 나 부자 아닌가요?

이민자 여러분 힘 내세요!!!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