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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 에세이] 처칠의 그림 그리기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은 영국의 정치가로 2차 대전 때 영국의 수상으로 전쟁을 이끌어 승리했다. 40세가 넘어 그림을 시작했지만 생전에 유화를 5백점이나 남긴 아마추어 미술가였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를 일생 괴롭힌 ‘반복성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치료방법으로 미술에 몰두했다는 점이다.

처칠은 반복해 찾아오는 우울증을 ‘검은 개’라고 불렸다. 검은 색은 절망적인 우울 증상을 의미하고 개는 항상 주인을 졸졸 따라다녀서 쫓아내기 어려운 동물인지라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처칠은 어려서부터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했다. 그는 7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났다. 아버지 랜돌프 경은 재무대신까지 지낸 인물로 정치에 바빠 자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머니 제니는 미국 출신 미인으로 사교계에서 활동하던 관계로 역시 자녀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 주로 보모에 의해 자라면서 조상인 말보로 공작 1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꿈을 키웠다. 이 선조 할아버지는 18세기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때 영국-네덜란드-독일 연합군 사령관으로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 군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7살에 기숙학교에 입학했지만 급우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고통스러운 학창생활은 2년 후 다른 학교로 전학가기 까지 계속되었는데 처칠은 당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떨쳐버리질 못했다.

그의 가계에는 우울증의 내력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우울증 환자였는데 아버지는 처칠이 20세였을 때 3기 매독으로 인해 45세 나이로 사망했다. 처칠은 젊어서 기차 승강대 앞에 서질 못했다. 순간적으로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1차 대전 중인 1915년 처칠은 처음으로 깊은 실의에 빠졌다. 당시 해군장관으로 오토만 터기 세력을 막기 위해 갈리폴리 전투를 강하게 주창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패퇴했으며 처칠은 그 결과를 책임지고 해군장관에서 해임된 직후였다. “1915년 5월 말 해군성을 떠날 때 나는 아직도 전쟁내각의 멤버였다. 그 위치에서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잔인하게도 맨 앞줄에 앉아 비극의 관찰자 노릇만 했어야 했다.” 그는 낙향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집에 담장을 치고 살았다. 거기서 그는 마침 형수가 수채화를 그리고 있는데 흥미를 보였다. 형수는 주저하지 않고 그에게 자기 아들의 화구를 주면서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했다.

“나는 붓을 만진 적도 없고 연필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이 40년을 지냈다. 누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내게 신비로움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림에 대해 새롭고 강렬한 흥미가 솟아났다. 캔버스와 화구는 놀랄만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이의 화구를 갖고 이리저리 실험을 하다가 다음 날 내 옷은 온통 물감과 기름으로 젖어버렸다.” 무경험도 그의 결심을 저지하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다. 그림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시간이 없다. 몇 년씩 그림 공부를 하고 목판화를 복사하고 석고상 앞에서 그림 연습을 하는 것은 젊었을 때나 할 일이다. 걸작을 만들려고 야망을 꿈꾸지 말라. 그저 화구를 들고 즐겨라. 용기만이 필요할 뿐.”

1945년 7월 처칠은 난생 처음으로 대영제국 수상을 뽑는 선거에 나섰다. 이차대전 중에도 수상직을 수행했지만 그때는 히틀러에 대해 유화정책을 쓰던 체임벌린이 책임을 지고 사직한 수상 직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영국인들은 정작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를 버렸다. 선거에서 졌다는 소식을 7월 말에 포스담에서 열린 삼상(三相) 회의(처칠, 로즈벨트, 스탈린)에서 들었다. 부인은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버지는 우울증에 빠져 모든 일이 곤란하게 만든다. 음식은 손에 대지도 않으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탈리아로 간다는구나.”라고 적었다.

일본군이 미주리 함 위에서 연합군에 항복한 직후 그는 이탈리아의 코모 호수로 갔다. 휴가 때 사용하기 위한 빌라가 있었다. “여기에 와서 그림을 다시 그리게 되니 좋소. 대 일본 전쟁이 승리로 끝나고 평화가 왔으니 마음이 한결 놓이오. 막대한 전후 문제 처리는 다른 사람들의 몫이고.” 코모 호수에 간 김에 그는 지중해인 이탈리아 쪽 리비에라까지 갔다. 거기서 그는 투명한 연 초록색 바다 물을 화폭에 그리면서 우울증에서 회복되었다.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서는 눈과 손을 지배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그림 그리는 자는 행복하다. 외롭지 않으니까. 빛과 색채, 평화와 희망, 이들이 화가와 함께 할 것이다.” “내가 후에 천당에 가면 처음 백만 년의 대부분은 그림 그리는데 쓰고 싶다. 그림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서는.”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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