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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과학자의 세상 보기] 폭풍 속으로

올 여름은 바빠서 여태 휴가를 못갔다. 대신 옛날생각이나 이것저것 해본다.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바로 이맘때, 내가 잘 아는 사람에게 있었던 일이다. 지금 그를 보면 좀 믿기 힘들지만 이 친구는 대학신입생때 교정에서 유도부 선배들에게 길거리 캐스팅(?)이 되었을 정도로 건장했다. 대학 2학년인 1988년 여름방학중에 친구 둘과 지리산을 종주했는데 힘이 남아돌았는지 이어서 혼자 제주도 무전여행을 했단다. 돌아온 얼마후에는 험하다는 치악산-월악산에도 갔다왔으니 우리가 스무살 안팎에는 그랬던가 보다.

산 이름에 설악산, 치악산, 월악산처럼 악(岳)자가 들어가면 험한 산이란 뜻이다. 하지만 치악산은 그리 강한 인상을 남기진 못했다. 치악산을 내려온 친구는 이어서 월악산으로 갔다. 그런데 시외버스에서 내려 산쪽으로 향하다보니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산에서 내려오고 계곡에서 놀던 사람들도 서둘러 텐트를 걷고 있더란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인데다 물어보기도 귀찮아서 별 생각 없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날씨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월악산은 등산객이 별로없네’하면서 산중턱까지 올라갔는데 헬리콥터가 나타나 경고방송을 하였단다. “태풍이 오고 있으니 즉시 하산하시오!”. 청개구리 기질이 좀 있는 이 친구는 잠시 생각끝에 태풍이 들이닥치기 전에 ‘후딱’ 다녀오기로 작정하였다. 속도를 내기 위해 메고있던 등산장비 등은 바위뒤에 숨겨놓았다. 바람이 점점 강해지는 가운데 산등성이에 오르니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비! 거기부터 정상인 영봉밑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산길이었는데 젖어서 거추장스러운 웃도리까지 벗어붙이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월악산의 정상을 이루고 있는 영봉은 울산바위처럼 거대한 바윗덩어리이다. 그 밑에 다다르니 비바람은 본격적인 폭풍우가 되어있었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인양 거대한 바위절벽둘레를 감싸고 올라가는 것은 녹슬어 삐꺽거리고 비에 젖어 미끄러운 철제계단이었다. 폭풍속에 이런 봉우리에 오르는게 안전한 것일까 벼락을 맞는 것은 아닐까 고심도 잠시,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오기로 친구는 그 철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올라보니 정상은 의외로 뽀송뽀송했다. 영봉이 비구름 먹구름보다 높아서였다. 이 바윗덩어리 정상 주변으로 거대한 먹구름들이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저만치서 날아오던 구름덩어리가 영봉절벽에 부딪히더니 손에 잡힐 듯 바로 눈앞에서무서운 기세로 솟구치는 것도 보았다. 마치 손오공의 근두운처럼 휙-뛰어오르면 타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은 구름들의 장관에 그는 넋을 잃었다.

옛날부터 워낙 신령스럽다해서 영봉(靈峰)이라고 불리웠던 곳이다. 폭풍을 뚫고 올라간, 아무도 없는 산정상에서의 그 특별한 순간에 압도되버린 친구는 털썩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단다. “제발 여자 친구 한명만…” 꽤 건실한 녀석이므로 ‘세계 평화’, ‘냉전해소’, ‘에이즈약개발’, ‘가족어른들의 건강’ 등을 위해서도 기도했을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1년 후에 그에게 정말로 여자친구가 생겼다. 몇년 후에는 결혼에도 골인했다. 신혼시절 그 특별한 곳을 보여주겠다며 힘든곳은 싫다는 새악씨를 끌고 영봉에 올랐지만 오히려 미움만 엄청나게 받았다나? 1988년에는 뛰어올라갔던 월악산인데 장가를 든 후 아내를 데리고 오르는 것은 열배 백배 더 힘들더란다. 그날따라 화창하고 등산객으로 붐비던 영봉도 폭풍속에 혼자 올랐던 ‘그 영봉’과는 너무 달라보였단다.

물론 몇년 사이 체력이 약해졌거나 월악산이 더 험해졌던 것은 아니다. 첫사랑 (?)이 결혼으로 이어져버린 그는 바야흐로 사랑이니 결혼이니 하는게 영화처럼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라는 걸 배우고 있었던 게다. ‘어른’이 되면서 이제부터 어깨에 걸머지게 된 막중한 삶의 무게를 그렇게 처음 체감해 보는 중이었겠지….




최영출 (생명공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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