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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 에세이] 불꽃같은 시인 바이런

“사랑스러운 소녀여! 그 입맞춤/지금보다 더 행복한 때가 올 때까지/나 고이 간직하여/그 때에야 그대의 입술에 돌려줄게요./헤어질 때 그대 반짝이던 눈빛은/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고,/그대 눈망울에 고인 눈물을 보니/내 마음 더욱 변할 수 없군요.” ‘이별’의 일부.

바이런 경(George Gordon Byron, 6th Baron, 1788-1824)은 영국 출신으로 낭만파 예술의 대표적 시인이다. 대표작으로 ‘차일드 해롤드의 순례’와 ‘돈 주안’이 있다. 시인으로서의 명성만이 아니라 일생을 통한 방탕한 생활, 심한 여인 편력과 이별, 도박, 부채, 마약 사용과 폭음, 근친상간과 동성애 등으로 유명했다. 이탈리아의 독립운동, 오토만 제국에 대항하는 그리스 독립전쟁 참가하면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조지 고든 바이런이란 이름으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아버지는 재산을 탕진하고 부인과 아들을 떠났다. 바이런이 태어나기 전에 부모는 이미 별거상태였다. 빚을 탕감받기 위해 어머니는 재산을 팔았고 바이런이 1살 때, 애버딘으로 이사해서 적은 수입으로 세를 들어 어렵게 살면서 자식을 키웠다. 그는 오른쪽 다리 불구로 인해 안짱다리로 태어났는데 대해 일생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 번은 계단에 누어있는 한 여인을 보고 다가가서 동정심에서 돈을 몇 푼 주자 그녀는 손길을 뿌리치고 낄낄거리며 절름거리는 시늉을 했다. 어린 바이런은 분노로 인해 사지를 떨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 일생 자신에 대한, 그리고 자기 시에 대한 비평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쉽게 적을 만들었다. 일생 괴롭힌 우울증, 신랄함 그리고 자신을 비참하다고 느끼는 감정은 여기에 연유한다고 본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질이 급하고 정열적이어서 가끔씩 통제 불능이었는데 이런 성질은 성장해서도 바뀌지 않았다. 그는 다정다감한 소년이었지만 때로는 두려움이 없고 담대했다고 한다. 일생을 통해 그는 우울증과 기분항진을 교대로 또는 함께 경험했다.

10살 때 큰아버지인 바이런 남작 5세가 죽자 그로부터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아 가난에서 벗어났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예전에 헨리 8세가 바이런 가족에 하사한 뉴스테드 저택으로 이사했다.



1805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 진학했으나 공부는 하지 않고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방종한 파티에 참석했고 방탕하고 무분별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파티에서는 해골로 뒨 컵에 술을 따라 마시는 행사도 있었다.

돈을 아끼지 않는 성격, 그리고 쾌락을 추구하는 생활로 인해 빚을 지게 되었고 부채는 급격하게 늘어났다. 대학 시절 새끼 곰 한 마리를 길렀다. 학칙에 의해 개를 기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곰을 데리고 산책을 하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렇게 그는 기발하고 남들의 이목을 끄는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20세가 되던 1808년 그는 이미 부정과 간통 등 욕정의 세계에 깊이 빠졌고 폭음과 마약 그리고 도박에서도 헤어나지 못했다.

이 무렵 바이런은 성가대의 15세의 소년가수 존 에델스턴과 깊은 애정에 빠졌다. 소년의 목소리와 미모에 반한 것이었다. 소년이 나중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이런은 ‘가장 큰 충격이었다. 세상에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사람이었고 그도 아마 죽는 날까지 나를 사랑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바이런은 ‘티르자’란 애가 연작을 발표했는데 상대방 호칭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꿔 남들의 의심을 피하려고 했다.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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