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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 에세이] 바이런 경의 격정적인 삶

1809년 시인 바이런은 2년에 걸쳐 유럽으로 ‘대 여행’을 떠났다. 당시 영국 귀족 청년들에게 유행하던 관습이었다. 당시 유럽은 나폴레옹이 벌인 전쟁으로 인해 접근하기 힘든 지역이 많았다. 그래서 포르투갈, 스페인, 지브롤터까지 갔다가 방향을 돌려 몰타, 알바니아, 그리스, 터키로 향했다. 근동 지역은 그가 어려서부터 꿈꾸던 곳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의 여행 목적은 우선 동성애 경험을 쌓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 오래 머물렀는데 이때 그에게 이탈리아 어를 가르쳐 준 15세의 소년과 격정적인 연애에 빠졌다. 소년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그는 소년을 몰타에 있는 수도원 학교에 유학시켰으며 은화 7천 파운드를 주어 보냈다. 그런가하면 하숙집 주인 과부의 딸을 사랑하여 ‘아테네의 처녀’라고 찬미했다.

그의 엽색 행각은 상상을 넘는 것이었다. 베니스에서 일 년에 250명의 여인과 잠자리는 같이 했다고 자랑했다. 그 행각은 여성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각계각층의 소년들이나 심지어 사촌들까지 섭렵했다.

그의 생활은 활기차고 신나고 적극적이었지만 1810년이 되면서 ‘나는 이렇게 악한 생활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퇴폐한 생활에 진력이 났다. 술과 육욕에 찬 생활을 절단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해 말이 다가오면서 그는 우울증에 빠졌다. ‘희망이 없다. 여기서 벗어날 길이 있을까. 혹시 영국에 돌아가면 방법이 있을지 모르지.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배를 발견할 수 있을는지.’ 우울증이 있으면 보통 기분항진이 뒤따르곤 했다.

1811년 그가 영국에 돌아올 때 이미 우울증에 빠져 있었지만 귀국 후 수개월 안에 어머니가 사망했고 두 친구를 잃었다. 어린 시절의 애인 에델스턴도 사망했다. 시인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는 수면과 식욕을 상실했고 즐거움을 잃었다. 유언장을 작성했으며 자기가 죽으면 어떤 장례행위도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기 시신을 사랑하던 강아지와 함께 묻어달라고 했다.



다음 해에 그는 우울증에서 서서히 회복되었다. 이미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던 그는 그해 2월, 상원에서 처음으로 연설을 했다. 사회 개혁을 주창하고 천주교를 옹호한 열정적인 연설이었지만 내용은 조금 과장되어 있었다.

그가 유럽 여행에서 쓰기 시작했던 ‘차일드 해롤드의 순례’가 드디어 출간되었는데 호평을 받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하루 밤사이에 어느새 유명하게 되었다.”라고 스스로 밝혔다. 그의 시집은 어느 집에나 구비되어 있었고 그는 일반인들의 대화에 유일한 대상이었다.

사회적으로 명성을 날리면서 여성 편력은 재발되었다. 정열적인 캐롤라인 램 부인, 중년의 옥스퍼드 부인, 이복누이인 오거스타 리, 프랜시스 웹스터 부인 등인데 주로 기혼 여성들이었다. 남편이 후에 수상이 된 캐롤라인 램 부인은 바이런을 만난 후 ‘미친, 나쁜, 가까이 하기엔 위험한 인물’이라고 평했지만 그에게 열정적으로 깊숙이 빠져들었다. 후에 바이런이 관계를 정리하려 했지만 그녀는 남들 앞에서 욕설을 퍼붓고 칼로 자기 몸을 찔렀다. 마치 스토커같이 계속 재회를 요구해서 결국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랐다.

조증에 들어가자 그는 ‘해적선’(The Corsair)이란 시를 하루에 2백 줄이나 썼다. 이 시집은 발간 첫 날에 1만 부, 한 달 안에는 2만5000부나 판매되었다.

이복누이인 오거스타 리와는 오랫동안 가깝게 지냈는데 그 무렵 그녀는 남편과 별거상태였고 두 사람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졌다. ‘맨프레드’란 시에서 “이 피는 나의 피다! 선조들의 혈관에서 흐르던 순수하고 뜨거운 피./우리들이 젊었을 때 우리들은 한 심장을 가졌다./사랑할 수 없었지만 우리들은 서로 사랑했다---.” “그녀는 나와 용모가 똑같았다. 그녀의 눈동자. 머리털, 용모도./또 목소리까지도. 나와 똑같이 말을 했다---.”라고 해서 근친상간의 관계를 직설적으로 언급했다. 그녀는 1814년 딸 메도라를 낳았다.

1814년 바이런은 캐롤라인 램 부인의 사촌인 애너벨라를 만나 청혼했고 다음해에 결혼했다. 격정적인 바이런에 비해 애너벨라는 차갑고 냉정하며 도덕적인 여자여서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았다. 아내가 딸 에이다를 낳았지만 그녀는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간 뒤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근친상간은 물론 여배우들과의 간통 등 나쁜 소문은 런던에 널리 퍼져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매일 밤잠을 설치고 복도를 서성거렸으며 자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권총과 단검을 마련했다.

부인과의 화합도 기대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이혼을 하고 영국을 떠났다. 그리고는 영영 고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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