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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만의 인간혁명]21세기 학생 발목 잡는 19세기 학교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9/11/22 18:03


[윤석만의 인간혁명]21C 학생 발목 잡는 19C 학교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주인공인 엄마와 딸이 신뢰하는 것은 학교가 아닌 사교육이다. [사진 JTBC]





지난 주 ‘인간혁명’에서는 SKY(서울·고려·연세) 대학생 중 잘 사는 계층(9·10분위)의 자녀들이 46%에 달하고 이들이 서울 강남과 같은 특정 지역에 몰려 있는 실태를 살펴봤습니다. 그러면서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입시를 통해 어떻게 대물림 되는지, 드라마 ‘SKY캐슬’처럼 ‘교육귀족’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분석했습니다.

아울러 학생들은 이미 21세기의 한복판을 살고 있는데 19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만들어진 학교체제가 아이들의 미래를 발목잡고 있는 현실도 짚어봤죠. 대표적으로 문·이과의 장벽을 없애고 융·복합 인재를 기른다며 도입된 통합과학·통합사회가 얼마나 비통합적으로 수업이 이뤄지는지 따져 봤습니다.

오늘은 공교육의 정반대 지점에서, 학부모와 학생의 융합 교육 수요를 만족시키고 있는 사교육의 사례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이는 사교육의 장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전혀 아닙니다. 공교육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 그 대안을 찾기 위해 비교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강남 학원가는 ‘STEAM’ 교육의 대표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미래역량을 키우기 위해서서는 문제를 풀기보다 문제를 낼 줄 알아야 하고, 지식을 외우기보단 스스로 지식을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역량은 국어·수학·영어 중심의 입시 공부로는 도저히 길러질 수 없죠. 학교와 정부도 문제지만, 융복합 역량을 학생들이 키울 수 있도록 하려면 교사 또한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수년 전부터 강남 학원가에는 인문학과 과학을 융합한 교육 프로그램이 인기입니다. 흔히 독서·토론 교육으로 불립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부터 인공지능·블록체인 같은 최신 과학기술까지 망라돼 있습니다. 선진국들이 미래교육으로 주창하는 ‘STEA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rts, Mathematics)’ 교육을 벤치마킹 하고 있는 것이죠.

‘STEAM’은 인문·과학 지식에 대한 이해를 높여 융합적 사고력을 기르고, 실생활과 연관된 문제 해결력을 키우는 교육을 뜻합니다. 켄 로스 미네르바스쿨 아시아 총괄 디렉터는 “미래에는 어느 한 분야의 지식만으론 복잡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하고 융합적으로 해결책을 찾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21세기 그랜드 투어



서울의 한 학원가 모습.[연합뉴스]





스폰지처럼 지식에 대한 학습 속도가 빠른 아이들에게 다양한 인문·과학적 경험을 하도록 만들어 융합적 인사이트를 갖게 하는 교육은 학부모들로부터 인기가 높습니다. 융·복합과 통섭의 측면에서 보면 학교보다 뛰어난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죠. 단순히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을 넘어 미래 사회에 필요한 역량과 소양을 기를 수 있도록 합니다.

강남의 한 학원의 홈페이지에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회과학과 수학을 넘는 통섭적 수업을 진행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철학 책을 읽으며 연관된 과학적 내용을 살펴보고, 수학 책을 보며 사회과학적 내용을 연결하는 수업을 한다”고 하죠. 학생 수준에 걸맞은 단계별 독서 커리큘럼까지 제공하고 있고요.

최근에는 초·중학생 아이들을 대상으로 유럽의 명소를 둘러보며 공부하는 인문·과학 기행 패키지도 성황입니다. 여행 가기 전에 미리 관련 공부를 하고 실제 현장에서 체험해 보는 거죠. 이만기 중앙유웨이 평가연구소장은 “근대 이전 귀족 자제들의 대표적 공부법이었던 그랜드 투어의 현대판”이라고 말합니다.

애덤 스미스도 한 때 과외선생?



그랜드 투어. [사진 웅진지식하우스]





그랜드 투어는 18~19세기 영국에서 지식인들이 귀족의 자녀들을 데리고 유럽 여행을 하며 그 나라의 기술과 산업, 역사와 철학 등을 공부했던 ‘수학여행’을 뜻합니다. 『국부론』으로 유명한 애덤 스미스도 당시 영국의 재무장관이었던 찰스 타운젠드의 아들과 그랜드 투어를 떠났습니다. 프랑스 여행 도중 케네 등의 중농주의(자유방임주의)를 접한 스미스는 귀국 후 『국부론』을 집필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교육과 공교육을 비교하는 이유는 학원이 학교보다 낫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백년대계인 교육이 철학과 지향점 없이 수시로 바뀌면서 미래세대의 역량을 떨어뜨리고 있고, 교육을 통해 사회·경제적 지위를 세습하려는 상류층의 기득권이 더욱 공고화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미래는 휴마인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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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과 공교육의 역할마저 뒤바뀌어 가는 시대에 우리는 교육의 본질에 대해 깊이 고민해봐야 합니다. 특히 인재가 가장 큰 자원인 ‘휴마인(human+mine)’의 시대에는 교육이 곧 미래 경쟁력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화석에너지가 산업발전의 주춧돌이었다면 이재는 인적자원(HR)이 성장을 위한 절대적 기준이 됩니다.

무엇보다 인재의 힘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대한민국은 4차 혁명시대가 기회일 수도 있고 위기일 수도 있습니다. 우수 인재를 바탕으로 혁신을 주도하면 또 다른 성장의 발판이 마련되겠지만, 인재를 키우는 교육 시스템이 시대에 적합하지 않다면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최초의 대학 볼로냐



최초의 대학 볼로냐대. [중앙포토]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 생긴 것은 11~12세기 남유럽입니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들은 유럽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십자군의 길목이었고 각지에서 거둬들인 교회의 자금이 한 데 모이는 곳이었죠. 그렇다 보니 세상의 온갖 물자가 베네치아와 피렌체 같은 상업도시들로 집중됐습니다. 그 중에서도 북부의 볼로냐는 유럽 전역에서 열정 가득한 청년들이 푸른 꿈을 안고 몰리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복잡한 상법이 젊은 상인들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있는 집’ 자제들은 개인 과외를 붙여 공부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청년들은 그럴 여유가 없었죠. 그래서 이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법률가를 초청해 공부했습니다. 나중엔 논리학, 수사학, 의학 등으로 범위가 넓어졌고요. 이 모임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오늘날 대학의 어원이 된 ‘universitas(자치조직)’입니다. 이렇게 세계 최초의 대학 볼로냐대학이 탄생한 거죠.

볼로냐대는 학생이 직접 교수를 채용하고 총장을 뽑았습니다. 실력이 떨어지거나 불성실한 교수는 내쳤고요. 수요자 중심의 다양성과 자율성이 교육의 핵심 원리였습니다. 그 결과 이탈리아는 14세기 르네상스라는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웠습니다.

학생의 니즈가 학교를 만들어



오프라인 교실이 따로 없는 대학 '미네르바스쿨'. [중앙포토]





이처럼 학교가 존재하는 근본적 이유는 학생의 니즈와 사회적 필요 때문입니다. 개인의 자아실현을 위해 필요한 역량과 지식을 습득하고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시민의식을 기르는 것이 학교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19세기 이후에 교육의 목적과 방법이 바뀌었습니다. 다행히도 대한민국은 근대 학교체제의 우등생이었죠. 누군가 혁신해 놓으면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가 돼 빨리 따라잡고 시장을 점유했습니다. 한국인 특유의 근성과 높은 교육열이 시너지를 일으켜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엔 퍼스트 무버(first mover)만이 살아남습니다. 현 정부의 경제 슬로건처럼 ‘혁신’하지 않으면 ‘성장’도 없습니다. 여기서 ‘혁신’이라는 것은 과거의 것들을 탈피하고 새로운 터전을 닦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본질적으로 미래교육의 근본적 방향은 19세기 근대 학교 체제를 깨부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욕망이 만드는 교육오년지소계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갈 것을 강조한다. [사진 JTBC]





그러나 한국의 교육 현실은 두 가지 잘못된 관념이 혁신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바로 정치가의 독선과 교육자의 타성입니다. 학교에는 물론 새로운 교육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선생님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어떤 교사들은 타성에 젖어 변화하는 것을 싫어하죠. 혁신적 교육 프로그램으로 수차례 우수교사 상을 받은 30대 교사 김모씨는 “동료 교사들의 인식을 바꾸는 게 제일 힘들었다, 오랜 관성이 학교의 변화를 발목잡고 있다”고 토로합니다.

교육자의 타성보다 더 큰 문제는 정치가의 독선입니다. ‘학생의 니즈’와 ‘사회적 필요’라는 교육의 근본 원리 대신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교육을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 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의 의견을 듣거나, 미래를 대비하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듣기보다는 자기만의 아집과 주변 지지자들과의 ‘집단사고(group thinking)’에 갇혀 비합리적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어사전 > 집단사고
사회심리학 이론. 내부 응집력이 높은 구성원들이 모인 집단일수록 이의제기보다는 동조가 많고, 이를 통해 획일화 된 결론이 내려지는 것을 합리적 의사결정이라고 여기는 현상.

교육을 희생양 삼는 정치인들



1970년대에 대입 예비고사를 치르고 있는 수험생들. [중앙포토]





또 정권을 잡은 권력자는 ‘민심’이라는 핑계로 교육을 희생양으로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복지정책이나 SOC사업과 달리 교육 분야는 큰 예산을 들이지 않고도 티가 많이 나는 정책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대학입시 문제가 논란이 되자 청와대와 교육부가 갑자기 정시 확대 방침을 발표하고, 2025년 외고·자사고 일괄 폐지 입장을 발표한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물론 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바꾸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외고·자사고가 사라지면 정부와 여권이 주장하는 ‘특권교육’이 사라질까요? 많은 사람들의 예측대로 “자사고로 몰렸던 학생들이 교육특구로 쏠리게 될”(이만기 소장) 가능성이 큽니다.

“자사고가 (교육특구인) 수성구 쏠림 현상을 완화시켰다”는 우동기 전 대구시 교육감의 말처럼 외고·자사고 폐지 후엔 ‘8학군’이 다시 부활하게 되는 거죠. 결국 서두에서 살펴본 리브스 박사의 분석처럼 특정지역의 계급 장벽만 높아지는 셈입니다.

교육의 본질은 자유와 다양성



르네상스의 성공은 학문의 다양성과 자율성에서 기원했다. 라파엘로는 그리스 문화의 부활을 꿈꾸며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아테네 학당’을 그렸다. 화면 정중앙의 플라톤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이상세계인 ‘이데아’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옆에 손바닥을 땅으로 향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세계를 강조했다. 그림 왼편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열변을 토하고 있는 인물이 소크라테스다. [중앙포토]





교육이 획일화 되고 다양성과 개별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에선 혁신의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실리콘 밸리가 기술혁명의 요람이 된 것은 중세 이탈리아가 상업의 중심이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시장의 필요는 상품을 만들어 내고 자유와 다양성은 혁신을 일으킵니다. 학생 개개인의 관심과 적성을 키우려면 그 만큼 학교의 종류도 다양해야 합니다. 학생 각자의 니즈를 담을 수 있는 여러 교육 방식이 존재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학교를 일반고로 통일하고, 필기시험 하나로만 아이들을 줄 세워 대학에 보내는 교육 방식으로 미래인재를 키울 수 있을까요. 획일화 된 교육은 학생과 사회의 다양한 니즈를 담기 어렵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처음 자립형사립고(현재의 자사고)를 도입한 이유도, 역대 정부가 ‘학교 다양화’라는 정책 기조를 유지한 원인도 그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상류층은 공교육에 큰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부를 사교육에 맡기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학교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의 적성과 소질만큼이나 교육의 방식도 다양해져야 개천에서 용 날 가능성이 커집니다.

볼로냐대가 생기고 얼마 후 르네상스 시기에는 자유와 다양성, 그 안에서 비롯되는 개별성과 창의성이 어두웠던 중세를 환하게 밝히며 역사의 진보를 이끌어냈습니다. 지금 우리는 르네상스를 꿈꾸면서 중세로 돌아가려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1세기 미래로 가려는 아이들을 19세기 학교가 발목 잡아선 안 됩니다.

sam@joongang.co.kr

#'윤석만의 인간혁명'은 월간중앙 12월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윤석만 기자는

국회·청와대·교육부 등 다양한 출입처를 거쳤다. 2012년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고려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경희대에서 미래 사회를 주제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과학·기술·산업만이 아닌 인간과 문화, 의식과 제도의 측면에서 조망하며 미래인문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휴마트 씽킹』, 『리라이트』, 『인간혁명의 시대』(2018 세종도서), 『미래인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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