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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한걸음씩 사랑하기

이기희
이기희 기자

[시카고 중앙일보] 기사입력 2020/06/30 15:53

‘어른 섬기면 자다가도 떡 생긴다’는 ‘어른 말씀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를 내가 바꾼 다른 버전이다. 지금은 먹거리가 흔하지만 예전에는 떡이 인기 있는 군것질이었다. 떡은 곡식을 찧어서 만들기 때문에 밥보다 곡식이 더 많이 들고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자다가 떡이 생기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평소에 어른 섬기며 잘 공경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면 복 받는다는 말이다.

다시 사랑에 빠졌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7년 동안 벼르고 준비했던 서부행 마차가 앞바퀴부터 이탈해 허망하게 본가로 귀향했다. 의기소침해져서 나홀로 극복할 심사로 고립무원을 자청, 연락두절하고 외롭게(?) 지내기로 작정했다. 마음먹은 데로 안 되는 게 인생살이. 사람 사는 일에는 변수가 매일 일어난다.

어찌어찌 해서 어르신 한 분과 가깝게 됐는데 손에 불티나게 맛난 음식을 해다 주신다. 내가 한 것이라곤 정성껏 만들어주시는 음식 황송하게 잘 먹었다는 인사 자주 올리고, 빈 그릇에 초콜렛 담아드리는 게 고작이었다. 김치 담그는데 젬병인걸 눈치 채셨는지 내 솜씨론 엄두도 못낼 열무김치 부추김치 오이소박이 냉면김치 시원한 굴김치 등등 김치공장을 방불케 정성스레 만들어 주신다. ‘음식 끝에 정 나지요’ 장선용 선생님 책 제목처럼 먹으면 정 나는 게 사람 사는 이치다.

잘 먹으면 힘난다! 그동안 타향살이에 얼어붙은 몸과 마음에 사랑이 김치국물처럼 스며들어 활기를 돋구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 뜯은 신선초 무쳐놨는데. 누가 꽈리 고추 갖다줘서 멸치에 볶아놓고…”. 라고 전화주시면 빛의 속도로 달려가 꾸벅 절하고 냉큼 받아온다. 마스크 쓰고 6피트 거리두기 규칙 지키느라 서로 손도 못 잡고 음식만 받아온다.

사랑하면 제일 먼저 눈빛이 변한다. 색안경 쓰고 떨어져 봐도 어르신 눈빛에 사랑이 출렁거린다. 몇 분 늦게 도착하면 나무 그늘 아래서 연인처럼 기다리신다. 먹거리 얻을 때 삼대 규칙은 연락오면 냉큼 가서 받아올 것,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필히, 즉각 인사 올릴 것. 음식 담은 그릇은 깨끗이 씻어 곧장 반납해야 또 얻어 먹을 기회가 생긴다.
이민 오신 어른들이 다 그렇듯 예전엔 황금송아지 장롱에 키웠던 분인데 무심한 세월이 빛나던 흔적을 지워버린 것 같다. 나는 만나는 사람들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그 사람의 지금 그 모습, 그 순간이 소중할 뿐이다.

나이 들면서 ‘내리사랑’이란 말이 실감 난다. 명절이면 어머니는 유과나 약과를 정성스레 빚어 교회 파킹랏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나눠주셨다. 인간차별 한다고 놀렸지만 특식 받은 사람은 다정하게 손 잡아드리며 건강과 안부를 묻던 사람들이다. 조그만 정성과 작은 배려가 어른들을 행복하게 한다.

나이는 헛되게 먹는 것이 아니다. 어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나이 먹었다고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른다운 품성을 지녀야 어른이 된다. 세월이 나이테를 만들고 벼처럼 허리가 굽어져야 잘 익은 알곡이 된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노을이 저녁 햇살을 껴안고 하늘가를 찬란하게 물들이듯, 아주 오래된 정원에서 피는 향기로운 꽃처럼 우주를 껴안고, 어른을 섬기고 어른 될 생각을 한다.

사랑은 조금씩 조금씩 물드는 것이다. 저녁 노을이 대지를 끌어안듯 낮아지고 넓어지는 것이다. 푸른 하늘 그림자 일렁이는 놋대야에 하얀 손수권 떨어트리면 조금씩 조금씩 물이 스며들듯, 사랑은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가는 것. (Q7 Fine Art대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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