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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현승 칼럼]당신이 치매에 걸리면


나는 아내와 영화보는 것을 좋아한다. 비싼 홈씨어터를 갖추어 놓지는 못했지만 소파에 앉아 블라인드를 내리고 불을 끄면 LED 삼성 대형 TV가 그런대로 영화관 기분을 내준다. 여기에 마이크로 웨이브에서 갓 꺼내온 팝콘에 차가운 맥주까지 들고 앉으면 세상 어느 영화관도 부럽지 않다.

아내와 데이트 할 때는 정작 영화를 많이 보지 못했다. 둘다 직장에 매인 몸이었기 때문에 퇴근하고 만나 밥먹고 반주 한 잔 하면 집에 갈 시간이었다. 아내와는 대학 다닐 때 연합 동아리 모임에서 알고 지내다가 졸업하고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 반가운 마음에 연락처를 주고 받고 심심할 때 마다 술 한잔 하자면서 서로 불러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려하면 “집에 가야한다”, “내일 출근해야 된다” 하면서 자리를 파해야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요즘 애들 말로 ‘꽐라’가 될 때까지 술을 마셔보는 것이 아내와 나의 소원이었다. 장난처럼 “우리 그냥 같이 살자”는 얘기가 나왔고 결국 결혼했다. 결혼하고 잠시 여유가 생겼던 것 같다. 가끔 ‘꽐라’가 될 때까지 술을 마시기도 했고, 같은 날 휴가를 내고 무작정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런데 갈수록 여유가 없어졌다. 여전히 둘다 직장에 다녀야 했고, 아이가 태어났고, 양쪽 집안의 대소사까지 살피다 보니 술 한잔은 커녕 얼굴도 잘 못보고 사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인생의 중요한 변화가 생기고 드디어는 이 미국땅까지 와서 살게 되었다. 인생이란 것이 참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즈음에서야 비로소 아내와 둘이서 영화를 볼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어제 아내와 함께 본 영화는 ‘노트북’이다. 같은 마을에 살던 부잣집 딸과 가난한 집 아들이 사랑에 빠졌다. 부모의 반대로 둘은 헤어지고 각각 다른 사람을 만나다가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이룬다. 만일 영화가 여기서 끝난다면 그냥 그런 로맨틱 청춘 영화로 기억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후반부에 가면 반전이 펼쳐진다. 젊은 두 남녀의 열정적인 사랑과 이별, 재회의 이야기를 노회한 목소리로 소설책처럼 읽어주는 할아버지와 자고 일어나면 할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바로 영화의 앞부분에서 사랑을 이룬 두 사람이다.



세상 예뻤던 여주인공은 세월이 흘러 청춘도 아름다움도 다 지나가버리고 이제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사랑했던 남편도, 자식도 기억못하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누구세요?”라고 묻는 할머니에게 변함없이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자신을 설명하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할아버지도 이미 건강을 잃어간다. 요양원으로 두 사람을 찾아온 자식들은 할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며 할아버지만이라도 집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너희 엄마가 있는 곳이 내 집이다” 라며 끝까지 할머니의 곁에 남는다. 영화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함께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내가 먼저 치매에 걸리면 나를 요양원에 넣어. 그리고 당신은 좋아하는 드럼도 치고 예쁜 할머니도 만나.” 아내가 먼저 말했다.

“내가 먼저 치매에 걸리면 당신은 그럴거야?” 내가 물었다.

“그럼. 당신 요양원에 넣고 잘 생긴 할아버지 만나서 골프치러 다닐거야.”

백세인생이라는 말이 남의 얘기가 아니다. 백세를 사는 동안 우리 둘중에 누구도 치매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노년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그런데 그렇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찔해진다. 아내도 나도 말이 없다.

비워버린 맥주잔을 채우려고 냉장고문을 여는데 아내가 막아선다. “알콜 너무 마시면 치매걸릴 확률이 높아진대. 우리 젊어서도 많이 마셨는데 이제 자제하자.”
“왜? 나 요양원에 보내고 다른 할아버지랑 골프치러 다닌다며…”

“요양원 값 비쌀까봐. 하하하” 소리내어 웃는 아내를 따라 나도 웃었다. 아, 행복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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