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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수 칼럼] 수박을 자르며

여름에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과일이 수박이다. 부담이 없다는 말은 이곳 미국에서는 수박이 싸다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수박값이 이곳 보다 네다섯 배 된다고 들었다. 싼 맛에 자주 사지만 두 내외만 사는 살림살이에 수박 한 통도 사실 버겁다. 수박 한 통 다 먹어 치우려면 한참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수박을 반 토막 내서 한 토막만 조각을 내고 다른 토막은 그로서리에 진열된 자른 수박처럼 셀로판종이를 씌워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이다. 물론 조각낸 수박도 별도 용기에 넣어두고 그것부터 조금씩 먼저 먹는다.

수박을 자르는 일은 언제나 내 몫이다. 늘 시큰거린다는 집사람 손목 때문이기도 하지만 큰 수박을 일도양단하는 일은 해보지 않으면 쉽지 않고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박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부엌에서 제일 큰 칼을 들고 나선다. 이놈은 늘 날이 잘 서 있기 마련이다.

수박 꼭지에 칼을 대고 칼날이 들어갈 곳을 어림잡는다. 왼손으로 수박이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고 오른손으로 과감하게 수박 표면을 따야 한다. 칼날이 미끄러지면 안 된다. 겨냥이 삐뚤어져도 안 된다. 칼날이 수박 겉면을 가르면서 점진적으로 서서히 손에 힘을 주어야 한다. 수박이 쩍하고 둘로 갈라지며 나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상쾌하다. 쌍둥이 수박 덩어리의 빨간 속살이 눈앞에 번쩍한다. 애초에 수박을 잘 골랐는지가 결판 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동안 여러 번 수박을 자르면서 수박 자르는 일을 인생의 참다운 유쾌한 일 33가지 중 하나라고 한 김성탄(金聖嘆)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는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를 살다 간 중국 소주 출신 문필가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여름날 새빨간 큰 소반에 새파랗게 잘 익은 수박을 올려놓고 잘 드는 칼로 한칼에 잘라버린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夏日于朱紅盤中, 自拔快刀, 切綠?西瓜. 不亦快哉!)”



400여 년 세월을 뛰어넘어 옛 선인의 느낀 바에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수박을 일도양단하는 데서 얻는 쾌감은 현대인도 계속 추구하고 있는 모양새다. 요새는 수박을 자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박 깨트리기 시합도 한다. 대개 눈을 가리고 편을 짜서 하는 것이 보통이다. 몇 해 전에는 앉은 자세로 허벅지 사이에 수박을 끼고 15초도 채 되기 전에 순전히 다리 힘으로만 수박 3개를 깨뜨려서 강철 허벅지 세계 챔피언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우크라이나 여성의 이야기도 기억난다. 세계의 어떤 남자 선수도 아직 이 기록을 깨지 못했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한국에는 ‘스트레스 해소방’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돈을 내고 제한 시간 안에 접시를 집어 던져 깨부수고 프린터, 밥통, 라디오, 선풍기 등의 소형 가전제품을 방망이나 망치로 작살내는 곳이다. 고무로 제작된 사람 모형의 마네킹도 방망이로 두들겨 팰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물건을 깨고 부수면서 생기는 짜릿한 감정과 카타르시스를 통해 평소에 쌓였던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린다는 얘기다. 가슴속 깊이 축적된 내적 스트레스를 풀 길이 없고, 불안한 감정 기복을 보이던 사람들도 약 15분가량 이 짓을 하고 나면 개운하고 속 시원한 마음으로 해소방을 떠나게 된다고 한다.

요즘 한국 내의 청년들이 취업, 결혼, 직장생활 등에서 지나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하더니 이런 곳도 생겼나 보다. 예로부터 화병은 만병의 근원이라고 했다. 20·30세대 청년층에게 특히 인기가 있다는 스트레스 해소방의 이런 화풀이가 그들의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물건을 깨부수고 결딴내는 데서 오는 순간적 희열과 쾌감 뒤에는 공허한 허무감이 뒤따를 수도 있다. 스트레스 해결의 근본적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한 과도한 해소방 출입은 해소방 방문 중독증을 유발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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