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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원 칼럼] 동토를 뚫고 나온 여린 새순

누구나 좋아하는 색이나 숫자, 단어가 있다. 옷이나 연필, 자동차를 선택할 때, 디자인도 그렇겠지만 색이 먼저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휴대폰 전화번호나 각종 비밀번호를 고를 때도 선호하는 숫자를 먼저 떠올리기 십상이다. 특정 기억이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혹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선택은 달라지기도 한다.

해마다 이맘 때면 새봄, 연두, 하늘, 춘삼월, 새순 같은 단어들이 입에 맴돈다.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 온다네~”로 시작하는 박인희의 맑고 고운 노랫말도 부지불식간 흘러나온다.

시카고의 긴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원하지 않던 흉노의 땅으로 떠나던 왕소군의 탄식과 비애를 담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은 왔건만 봄 같지 않다)까지는 아니어도 아침 저녁 여전히 차가운 공기는 아직 봄을 노래하기엔 이르다.

그래도 설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북극보다 더 추운 영하 50도의 혹한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새봄은 사방에서 시작된다. 꽁꽁 얼었다가 녹은 대지에선 어느새 오묘한 연두빛 수선화 싹이 새끼 손가락처럼 올라왔다. 누렇게 퇴색한 잔디 사이로 초록빛 풀들이 하루가 다르게 퍼져간다.

폭설이 내릴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부러지던 삭정이는 물오른 봄가지들 사이에 겨우 붙어 있거나 봄바람에 견디다 못해 땅바닥에 지친 몸을 누인다.

‘작은 씨앗을 심는 사람들’이라는 책에 “클리블랜드의 겨울이 혹독하고 길고 심지어 4, 5월에도 함박눈이 내리지만 마침내 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소설 속 주인공 플로렌스가 오대호의 하나인 이리호 너머에 있는 캐나다를 육안으로 볼 순 없지만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것처럼 봄의 도래는 우리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새봄에는 무거운 겨울외투를 벗어 던지듯 가슴 속에 쌓인 해묵은 것들부터 말끔히 털어낼 일이다. 더 가볍고 경쾌한 시간을 누리기 위해선 불필요한 근심, 걱정부터 없애야 한다. 미움과 갈등, 불화와 반목 같은 부정적 언어는 떠나가는 겨울편에 딸려 보내는 게 좋겠다.

그리고 무미건조한 무채색의 시간에서 벗어나야 한다. 칙칙한 잿빛 하늘이 아닌 맑은 하늘처럼 투명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편안한 시선으로 세상을 관조할 때 거친 나무껍질 사이로 움을 틔우는 새순이 보인다.

봄날 이른 새벽부터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기 위해선 열린 귀가 필요하다. 자신만의 세상에 고립된 이에게 청아한 새소리는 한낱 소음에 불과할 수 있다.

겨울이 아무리 길고 추워도 동토의 땅을 헤치고 여리고 여린 새순이 솟는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고 모질어도 작은 몸짓 하나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발행인)


노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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