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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석·윤시내 부부의 시베리아~몽골 횡단 기차여행-④

열 개 성당이 내부로 연결된 성 바실리 성당
퍼즐처럼 꽉 짜인 지붕과 첨탑 눈 뗄 수 없어

모스코: 붉은광장의 위용(偉容)과 빅토르 초이 추모의 벽
센터럴파크처럼 자유롭고 아름다운 ‘고키파크’
이름 모르는 두 청년의 친절 잊혀지지 않아

100세를 앞둔 어머니가 가끔, 내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 하고 의아해하시던 일을 잊을 수 없다. 세월의 빠름을 그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6월11일 이른 아침 시베리아 횡단의 종착역 모스코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이 꼭 그러했다. 언제 여기까지 왔지?

여행안내서는 개인적으로 러시아 여행을 할 경우 러시아 고유 문자, 키릴(Cyrillic) 알파벳을 배울 것을 강력하게 권고한다. 적어도 건물, 박물관, 지하철역, 길 이름 등을 읽을 수 있어야 목적지를 찾아갈 것이고, 북구의 여러 나라와 달리 러시아인은 영어에 익숙지 않아 행인의 도움을 기대해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새로운 언어를 배울 나이인가. 알던 것도 잊어버릴 판인데. 그래도 길 이름 정도는 읽어야 되겠기에 부엌 칠판에 키릴 알파벳을 써놓고 오가며 외우려 해봤지만 헛수고였다. 몇 달을 공부해서 겨우 안 것은 키릴어 몇 단어 정도다.



다행히 한인 여행사 ‘백야 나라’(www.100yanara.com) 에서 정기적으로 투어를 하고 있다. ‘모스코 심장투어’(일인당 약 6만원)는 붉은 광장, 우즈펜스키 성당, 성 바실리 성당 등을 온종일 걸어 다니며 보여주는 것이다. 흐린 날씨에 비까지 내려서 우산 썼는데도 어깨, 팔, 다리가 흠뻑 젖고 춥다. 안내자는 남편 따라 왔다가 그냥 눌러앉게 되었다는 중년 여인이다. 빗속에서도 열심히 설명해주고 성실하게 안내해준다.

‘부활의 문’을 통해 붉은 광장 안으로 들어가니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넓디넓은 광장 끝에 모스코의 상징 성 바실리 성당이 달력 속 그림처럼 또렷하게 서 있다. 외부에서는 하나로 보이지만 실제는 열개 성당이 내부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서로 대조되는 색깔과 다양하고 정교한 무늬로 장식된 양파 모양의 지붕과 첨탑은 마치 퍼즐처럼 오밀조밀 꽉 짜여 있어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안내자는 러시아 정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성화(icon)라고 한다. 성당 크기에 따라 성화가 세줄 혹은 다섯 줄로 전시되어 있으며, 중앙에 왕의 문(King’s Gate)이 있는데 미사를 드릴 때 사제는 그 문 안으로 들어가서 집전, 신자들은 미사 자체를 볼 수 없다고 한다. 가톨릭 성당과 달리 의자가 없어서 신자들은 서서 기도한 후 성화에 입을 맞춘다.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가 머리에 미사포를 쓰고 성화에 입 맞추기 위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경건하고 아름답다.

우즈펜스키 성당(성모승천 성당)은 다섯 개 황금빛 원형 지붕과 간결한 선과 흰색 외벽이 어우러져서 단아함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반 3세가 따따르 칸의 법전을 여기서 찢어버리고 250여 년의 몽골 지배하에서 벗어난 역사적인 장소이며, 그 후 로마노프 왕조의 대관식이 거행된 곳이다.

‘모스코 환상투어’(일인당 약 6만원) 역시 걷거나 시내버스와 모스코 강 유람선을 타고 모스코 외곽을 보는 것인데 안내자는 젊은 청년이다. 바리스타로 국제대회에서 상도 받고 한국에서 돈도 잘 벌고 유명했지만, 미국 대신 모스코로 유학 오게 됐노라고 한다. 우리가 전철을 잘못 타는 바람에 집합장소에 20여 분 늦게 도착했는데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대조국전쟁 기념관’에 전시된 디오라마(diorama) 설명을 실감 나게 한다. 2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에서 독일과 당시 소련의 접전상황을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한 디오라마 그림들은 소련이 치른 치열한 전쟁에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준다.

모스코강 유람선을 타고 지친 다리를 쉬는 사이 모스코 국립대학, 그리스도 구세주 성당 등이 흘러간다. 19세기 말, 44년 걸려 지은 성당은 스탈린의 명으로 파괴되었다가 2000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성당에 들어가려고 줄을 선 사람들이 수백 명은 될 듯하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들어갈까 말까 해 방문을 포기하겠노라는 안내자의 결정이 고맙다. 모르긴 해도 내부는 지금껏 본 성당들과 비슷할 테니 밖에서 저 황금빛 아름다운 지붕이 먹구름 낀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서울 명동 거리와 흡사한 아르바트 거리는 보행자 전용 도로이다. 기념품 파는 상점들, 카페, 푸시킨 부부가 살던 집, 거리의 예술가들로 활기차고 재미있다. 푸시킨은 변함없이 러시아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의 싯구로 우리에게도 친근하다.

아르바트 거리 끄트머리쯤에서 안내자는 “이제 지금까지 숨겨온 보물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집 한 채가 넉넉히 들어갈 만한 지저분한 공터를 가리킨다. 한쪽 벽은 읽을 수 없는 낙서로 가득하고, 젊은 남자 얼굴이 그 안에 있고, 벽 아래 나무상자 위에는 시들은 꽃송이들이 널려있다. 저 사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는 안내자의 질문에 우리 그룹 사람들은 대답을 못 한다. “아, 빅토르 초이를 모르시는군요? 그럼 빅토르 안은 아시나요?” 하고 그가 다시 묻자, 러시아로 귀화한 스케이트 선수 아니냐고 누가 대답한다. 안내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현수가 러시아 이름을 빅토르로 정한 것은 아마 저 사람 때문일 거라고 한다.

1962년 한국계 러시아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빅토르 초이는 어려서부터 작곡을 했고, 4인조 록밴드 키(Kino)를 만들어 자기가 작곡한 노래를 불렀다. 공식적인 음악활동을 할 수 없었던 공산주의 시절이라 지하에서 키노 밴드의 음악을 녹음했고, 그의 음악은 테이프 복사판으로 전국에 퍼졌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가수였으나 늘 가난하게 살았으며, 유명해지기 전 그가 하던 일, 즉 아파트 지하실에서 보일러에 불을 때는 화부(火夫) 일을 계속하였다. 교통사고로 28세에 사망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사인을 의심했으며, 추모하는 글을 누군가 이 벽에 쓴 이후 27년이 지난 오늘까지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 있는 팬들이 찾아와 그를 기리고 그리워하는 글을 벽에 쓰고 꽃을 바친다고 한다. 한 예술가의 짧은 인생은 그의 핏줄 속에 한국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애절하다.

모스코 여행에서 잊을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고키 파크(Gorki Park). 오래전 베스트 셀러였던 스파이 소설의 제목이 ‘고키 파크’이어서 어딘가 음침하고 무섭고 위험할 것이라는 선입관이 있었는데 직접 와 보니, 모스코강 옆에 자리 잡은 공원은 뉴욕 센트럴 파크 못지 않게 넓고 자유롭고 아름답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거나 웃통을 벗어부친 남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탁구를 하고, 어린 소년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비틀거리며 달리고, 백발의 할머니는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는다. 맑게 갠 여름날의 저녁 한때를 가족과 함께 즐기는 것은 러시아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둘째는 이름 모르는 두 청년의 친절이다. 열흘을 전화 없이 살고 나서 모스코에 도착하자 역 구내 잡화상에서 심(SIM) 카드를 사 넣었는데(약 900 루불) 통화가 되지 않는다. 스마트폰 전문점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더니 스무 살 안팎의 앳된 청년 둘이 가게를 지키고 있다가 다른 손님을 맞는 틈틈이 한 시간도 넘게 번갈아가며 손보아주었다. 깨어진 선입관과 이름 없는 러시아인들의 친절. 사진에는 없는 추억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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