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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삶] 어느 날의 저녁 풍경

여름에는 저녁을/마당에서 먹는다/초저녁에도 환한 달빛/(…)아! 달빛을 먹는다/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오규원 시인의 '여름에는 저녁을' 부분

내후년이면 백세가 되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오형제 내외가 저녁을 먹습니다. 막내시동생 집 뒷마당입니다. 온갖 야채를 심어 가꾸는 시동생의 뒷마당은 볼거리가 많습니다. 직접 만들어 놓은 야외용 가구들은 프로의 실력 못지않습니다. 농사 솜씨도 가일층 합니다. 올해도 갖가지 채소들이 자라고 있네요. 막 익어가는 방울토마토를 땁니다. 풋고추도 제법 먹을 만하게 자랐습니다. 호박으로 전을 부치고 케일과 상추로 겉절이를 합니다. 열무김치와 보리밥이 식탁의 풍요를 더해줍니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식탁, 막내시동생이 내년이면 환갑이니 다섯 형제 모두가 어지간한 나이입니다. 그럼에도 노모 앞에서는 다 어린애들이어서 어머니를 즐겁게 해 드리려고 하하, 호호, 장난이 유쾌합니다. 노을이 기울어갑니다. 행복한 미소가 노모의 얼굴에 그득하지만 잠깐씩 기쁨인지 슬픔인지 구분이 안 되는 그림자가 스치기도 합니다. 시간의 계수가 무색해진 연세지만 아직도 자식들 앞에서는 총수의 지리에 있습니다. 식탁은 좀 더 밝은 색으로 칠을 해라, 둘째는 머리 염색을 하면 좋겠다는 등등 훈수를 두십니다.



막내란 어머니에게 아픈 다섯 손가락 중 제일 아린 손가락인 것 같습니다. 아들에게도 막내라는 위치는 피할 수 없이 눅눅한 자리인 것 같습니다. 다섯 아들 중 유독 막내아들의 어머니 사랑이 별납니다. 생이 무엇으로 연명될까요. 사랑과 자비 같은 보편의 가치로 이어지겠지만 연민이라는 처연한 끈에 이끌려 가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바꿔 놓은 관계성의 구도는 아귀를 맞추기 힘듭니다. 서걱거리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사십 년이란 세월은 어떤 서걱거림도 무난히 맞추어갈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혼 한지 사십 년, 제가 이 집안에 어머니와 며느리라는 관계, 아우와 형이라는 관계를 맺고 살아 온 세월입니다. 나는 없었고 관계와 의무만 있었던 것 같기도 한 세월이지만, 그 시간의 발효 속에 이젠 애초부터 한 핏줄이었던 양 편안합니다. 색깔과 문양이 다른 며느리 다섯이 몽돌이 되기까지의 긴 시간을 응원하며 격려하는 시동생들의 형수 사랑이 고맙기만 합니다.

관계의 부조리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시댁이 싫어서 시금치도 안 먹는다는 우스갯소리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해당사자들 간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며느리와 시댁은 끊임없이 갈등이 유발됩니다. 시대가 변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싶습니다. 그렇더라도 세월 속에서 함께 유영하다 보니 닮은꼴이 되었습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것이라기보다 그저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서로에 대한 연민 아닌가 싶습니다.

반딧불이가 날라 다닙니다. 여름 밤이 깊어갑니다. 생의 격동기를 지나고 난 사람들만의 화해 같은 걸까요. 촌수와 상관없는 친구 같은 가족입니다. 노모와 함께하는 이런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바짝 다가 선 어머니는 점점 작아집니다. 이별은 예고 없이 느닷없이 들이 닥칠 것이어서 이 시간은 훗날 이야기로 남을 것입니다.

번개팅이라는 이름으로 만남을 제안하면 계획이 된 것처럼 모여 저녁 한 때를 보내는 여름날의 저녁, 가족이란 때로 맹물처럼 무심하기도 하지만 무명천 같이 우리의 생을 외롭지 않게 감싸줍니다. 살아온 날들은 살아갈 날들의 담보가 될 것입니다.


조성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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