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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 에세이] 그로피우스, 베르펠 그리고 알마 말러

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의 부인 알마는 1910년 큰 딸을 잃은 후 우울증에 빠졌는데 휴식을 위해 토벨바드란 온천에 휴양을 갔다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란 젊은 건축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그녀는 남편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로피우스 대신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64)란 젊은 화가와 눈이 맞아 한동안 정열을 태웠다. 그러나 그의 독점적이고 억압적인 사랑에 답답함을 느낀 알마는 일차 대전이 발발하자 코코슈카에게 군에 징집되기보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에 자원입대할 것을 권했고 그도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보병부대 근무에 부적격 판결이 내리자 기마부대에 입대했다. 이를 위해 유화 ‘바람의 신부’를 팔아 자금을 마련하여 말 한필을 샀다. 그가 군대에 가자마자 알마는 독일 군으로 복무 중이었던 그로피우스에게 연락을 취하여 약혼했다. 서부전선에서 근무하다가 휴가로 후방에 나온 틈을 이용해 이들은 1915년에 결혼했다. 그녀는 말러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임신한 후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다음 해에 그들 사이에 딸 마논 그로피우스가 출생했다. 그녀가 18세에 소아마비로 사망했을 때 작곡가 알반 베르크는 그녀를 기념하기 위해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여 헌정했다.



1918년 마틴이란 아들이 태어났다. 처음 그로피우스는 그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알마는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 1890-1945)이란 젊은 체코 출신 작가 겸 시인과 1917년부터 염문에 빠져 있었고 당시 비엔나 사회에서는 그 아이가 베르펠의 소생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알마는 비엔나에서 베르펠이 지은 시를 이용해 가곡을 만들다가 서로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그가 자기보다 11살이나 어리고 키가 작은데다가 유태인의 용모가 너무 뚜렷해서 호감이 가지 않았으나 자주 만나다보니 연인 사이로 발전한 것이었다. 마틴은 조숙아로 태어났는데 뇌실에 물이 차는 뇌수종으로 인해 생후 10개월 만에 사망했다. 1920년 마음에 내키지 않았으나 그로피우스는 이혼에 동의했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 건축학교를 세워 많은 후배를 양성했다. 그는 르 코르뷔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루에와 함께 20세기 건축계의 4대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두 번째 부인과 결혼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활발한 건축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말년까지 하버드 대학교에서 원로교수로 재직했다.

그로피우스는 1969년 자신이 설계한 터프츠 대학 건물이 내려다보이는 병원에서 사망했는데 그 원인은 말러와 마찬가지로 심 내막염이었다. 말러의 저주가 작용했던 것일까?

베르펠과 알마는 공공연하게 동거생활을 유지하다가 1929년에 결혼했다.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그들은 프랑스로 이주했다. 1938년부터 여름부터 1940년까지 지중해를 대한 한 마을에 정착했다. 프랑스에 있을 때 그들은 루르드를 방문한 적이 있다. 여기서 자극을 받아 베르펠은 한 소녀가 성모 마리아의 환상을 보는 소설 ‘버나데트의 노래’란 소설을 지어 일년 이상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화화되어 1943년 4개 부분서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나치스의 세력이 증가하자 이들에게 프랑스도 안전한 지역은 아니었다. 미국으로 이민을 원했지만 비자를 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프랑스 비시 정부의 눈을 피해 도보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에 도착했고 포르투갈로 가서 뉴욕행 기선에 몸을 실었다. 1945년 베르펠이 LA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하자 알마는 뉴욕으로 이주했는데 거기서도 알마는 예술인들의 사교에 중심이 되었다.

알마 말러는 1964년 뉴욕에서 사망했지만 그녀의 유해는 비엔나로 옮겨 저 첫 남편인 구스타브 말러의 곁에 묻혔다.

그녀는 생전에 4개 예술분야의 미망인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음악(말러), 미술(코코슈카) 건축(그로피우스) 및 문학(베르펠)을 말한다. 일생에 걸쳐 네 명 이상의 남자와 관계를 가진 여성은 그리 드물지 않다. 네 번 이상 결혼한 여성도 드물지만 좀 있다. 그러나 네 번이나 깊은 관계를 가진 남자가 모두 당시 예술계의 정상인 경우는 알마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말년에 누군가가 그녀에게 네 명의 남자들 중 누가 가장 인상적이었냐고 물었다. 그녀는 코코슈카를 꼽으면서 그 앞에서 자기는 가장 여성적인 존대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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