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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는 창가]큐 복음서

심현섭, 수필가
amt6907@hotmail.com

대학에서 서양사를 공부할 때 담당교수인 염은현 교수는 서양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성서를 필독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서양의 역사 진전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성립과 전파, 그리고 기독교 문화 그 자체라는데 있는 것이었다.


기독교 문화가 오늘날의 서구를 발전시키고 성장시켜 왔는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유럽은 점점 기독교와 멀어져 가고 있다.


첫째는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10%도 안 된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는 성서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캐나다를 비롯해서 유럽의 각국을 비기독교 국가라고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네들의 헌법을 비롯하여 사회제도와 도덕이 그대로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문화는 종교를 바탕으로 태어나고 그 문화를 탄생시킨 종교가 쇠퇴하거나 소멸하면 그 문화 역시 쇠퇴할 수밖에 없다고 갈파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회가 새로운 전기를 재창조하는 정신으로 마지 하지 않으면 서구 문화와 함께 쇠퇴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다.


2천 년 전 한 외로운 유대 청년 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자칭하며 하늘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새롭게 거듭 태어날 것을 외쳤다.
그가 어떻게 태어났든, 어떻게 죽었든 그는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시켜주는 생명의 말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우리에게 예수의 말을 전해주는 유일한 통로는 4복음서이다.
신학자들에 의해 확인된 바에 의하면 예수 사후 약 20년에서 70년 사이에 희랍어로 기술되었다고 한다.
성령의 힘으로 기록되었다고 해서 원리주의를 내세우는 교회에서는 지금도 성서의 무오류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서로 다른 표현과 오류와 누락, 첨삭을 목격하며 복음서마다 다른 관점과 의도를 가지고 기술된 것을 객관적으로 무시할 도리가 없다.


마가복음서 661절 중에서 600절을 마태복음의 저자는 옮겨 적었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마가복음서 중에서 350절을 옮겨 적었다.
이리하여 마가복음서는 마태나 누가복음서 보다 먼저 기술되었다는 알게 되었다.


1838년 크리스티안 빌케(Christian Wilke)는 마가복음의 원초성을 확고하게 만들었는데 마가복음 자료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공유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큐복음서> 도올 김용옥 편, 역주 통나무2008년
그런데 마가복음서에서 옮겨 적은 것 이외에 마태와 누가 복음서에서 공히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 발견되었다.


1838년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 신학 교수였던 크리스티안 헤르만 바이세(Christian Hermann Weisse)는 마가복음서를 참고하면서 마태와 누가가 복음서를 썼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마가복음서 자료를 제외한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 부분 속에 또 하나의 공통자료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자료를 독일어인 크벨레(Quelle)의 첫 글자를 따서 Q자료라고 불렀다.
Q자료는 예수의 초기어록(Record of Sayings)일 뿐으로 예수의 행적이나 생애에 대해서는 전연 언급하고 있지 않다.
기록 연대는 AD 50-70년 이전으로 추정되며 복음서의 형태로 남겨진 것이 없기 때문에 다만 오랜 동안 보이지 않는 성서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었다.


1907년 베를린 대학의 교회사 신학교수인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은 Q자료를 희랍어 원문으로 재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르낙은 예수의 복음은 교회의 법령이나 교리, 교조와 전혀 무관한 것이며, 복음이 현대사회에서 의미를 지니고자 한다면 ‘하나님과 그리스도’라는 도그마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Q자료야말로 그리스도 즉 메시아적 케리그마 형성 이전의 순결한 예수운동의 자료라고 생각했다.
하르낙 같은 Q를 복원한 사상가들은 이 Q야말로 진정한 예수의 모습이며, 마가가 제시하는 예수생애 내러티브는 희랍비극장르를 종교적 수난설화로 변형시킨 픽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과연 예수가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았는가? 과연 요한복음이 기술하고 있듯이 그토록 상세한 빌라도 총독과 예수와의 대화가 재판기록으로 남아있었을까?
<큐복음서> 28쪽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는 것이다.
예수가 동정녀로부터 성령에 의해 태어났느냐, 아니냐.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물 위를 걸었으며, 죽은 자를 살려냈다는 온갖 기적을 사실대로 믿을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라고 본다.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에다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수많은 사람들의 죄까지 모두 갚아주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예수 사후의 저자들은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자신들의 교회공동체에 부합할 수 있는 의도를 가지고 성서가 순수한 예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는 수난 생애에 강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의 위대성이 그의 말씀에 있는 것이라면 그의 생애와 행적은 이차적인 것이다.
3천명을 먹였느냐, 4천명을 먹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산상에서 외친 그의 말씀이 중요한 것이다.


“가난한 그대들이여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라.” Q9(마 5:1-3, 눅 6:12-20)

“이제 주린 그대들이여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그대들이여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니라.” Q10(마5:6, 눅 6:21)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Q14(마 5:44,46, 눅 6:27,28)

예수께서는 힘없고 약한 자들의 곁에서 그들에게 굳건한 희망과 용기를 주었고, 세상에 평화를 위해 서로 사랑할 것을 설파하였다.
이 말씀을 지키는 자는 예수를 믿는다 할 것이요, 이 말씀을 입으로 외우기만 하고, 몸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이니 스스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 복음서가 객관적 예수전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을 두고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를 것이다.
사실만을 찾는 사람이라면 허탈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반대로 사실도 사실이지만 의미를 찾는 사람이라면 여러 가지 예수관을 담고 있는 복음서를 객관적 예수전보다 훨씬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정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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