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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추억 창고 대방출

허선영 제1회 텍사스 한인예술공모전 대상 수상자

일가친척은 물론 사돈에 팔촌이 한명도 없는 드넓은 미국 땅에서 여행을 가지 않는 연휴는 무료하기 그지없다. 물론 이웃사촌이란 말처럼 잘 만난 이웃하나 열 사촌 안부럽다지만 그 이웃 또한 가족모임이 있거나 여행을 가버린다면 무료함은 적막감으로 변해버리곤 한다. 올해가 그런 해이다. 내년 여름에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기도 하고 하이스쿨에 다니는 아들의 농구팀 연습과 경기가 겨울 방학 내내 잡혀 있어서 이래저래 연말연시를 가족끼리 똘똘 뭉쳐서 보내게 되었다.

아이들이 미들스쿨에 들어가면서부터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하는 일중에 하나는 해리포터를 1편부터 다시보기를 하는 것이다. 하루에 두 편, 세 편씩 보다보면 해리포터페인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제는 막내도 제법 컸다고 언니오빠 틈에 껴서 한자리 차지했다. 소파에 몸을 포개고 쿠션하나씩 옆에 끼고 이불 하나씩 돌돌 말고 팝콘을 먹으며 몇 번을 봐서 외워버린 영화 속 대사를 따라하며 보고 있는 세 아이들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이들이 사랑스럽거나 기특해서 나오는 웃음은 아니다.)

나는 문득 지나다니며 힐끗 티브이를 보다가 해리포터의 성장에 눈을 떼지 못했다. 헤르미욘느와 론도 마찬가지로 며칠 사이에 조그만 아이에서 성인이 되어있었다. 새삼 해리포터와 함께 성장한 내 아이들에게 시선이 멈추었다. 사춘기를 지나고 폭풍 성장한 아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제 3학년이 된 막내도 제법 커서 나름 커다란 소파가 꽉 찼다. 정말 언제 이렇게 커버린거지? 나는 몇 년 묵혀두었던 보물 상자를 옷장의 선반에서 꺼내서 거실로 가지고 내려왔다. 해리포터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해리포터의 마지막 타이틀이 흐르고 아이들은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주섬주섬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보고 와우! 하는 탄성을 질렀다. 나의 손에 들린 씨디 한 장은 지금은 시니어가 된 딸아이의 돌잔치부터 두 살 터울인 아들의 탄생까지 담긴 가족비디오였다. 해리포터 디비디를 꺼내자마자 까만 매직으로 2000년 11월 30~2001년 8월. NO,1’이라고 적힌 디비디를 넣고 남편까지 비좁은 소파에 몸을 구겨 넣고 온 가족이 모여서 추억여행을 시작했다.

나보다 훌쩍 커버린 큰딸은 어느새 아기가 되어서 색동저고리와 빨간 치마를 입고 머리에 족두리까지 쓰고 있었다. 뭐가 짜증이 났는지 찡얼거리며 족두리를 벗어버리고 두리번거렸다. 돌상 앞에서 놀란 눈으로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선들을 마주하며 겁먹은 표정을 짓다가 내가 ‘**이 이쁜짓~!’ 하자 검지로 볼을 콕 찍으며 씩 웃었다. 곧이어 눈도 못 뜨고 있는 아들이 큰일을 보는지 입술이 파래질 정도로 힘을 주고는 이내 편안한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었고 또 다시 커버린 아이들은 조그만 트리 앞에서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며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알고계신데~.’하며 노래를 불렀다. 디비디 하나에 추억창고가 대방출된 듯 마구마구 쏟아져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참, 열심히도 찍어댔다.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를 씨디로 모두 구워놓은 남편도 칭찬할 만 했다. 수많은 일상들 중에서 포인트가 되어 기억되어지는 일상이 추억이라 치면 추억을 차곡차곡 창고에 저장하는 방법은 사진이나 동영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리포터가 휩쓸고 간 티브이에서는 이젠 막내가 태어났고, 데이케어에서 생일 파티를 했고, 필드 트립을 가고 또 큰아이들의 오케스트라 공연이 흘러나왔다. ‘사장님이 미쳤어요!’ 라고 싸인을 붙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추억창고는 마진하나 남기지 않고 온 가족을 미친 듯 웃게 만들어 주었다.

혹시나 이번 연말에 남들 다 가는 여행 한번 못가서 서운한 사람들이 있다면 성수기라서 치솟을 대로 치솟은 값비싼 비행기 표를 끊고 북적대는 인파들 사이에서 바둥거리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지만 몇 곱절 가치 있는 추억여행으로 위로받기를 바란다. 행복은 사소하기도하고 가끔은 특별하기도 한 일상의 범주를 넘지 않는 곳에 항상 있다. 묵혀두었던 일상에서 추억 하나씩 꺼내다보면 결국은 추억창고를 대방출하며 행복할 듯싶다.

허선영 제1회 텍사스 한인예술공모전 대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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