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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우리들의 이야기

신호철
신호철 

[시카고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9/10/28 17:30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난 곳은 선배의 화실에서였다. 나는 아르바이트로 미대 지망생을 가르치고 있었고 아내는 선배 애인의 친구로 자주 화실을 들리는 편이었다. 같은 대학에 다니면서도 우린 한번도 교정에서 마주친 적이 없었다. 서로 지나치며 어깨를 부딪칠 수도 있겠고, 서로 쳐다보며 가던 길을 스칠 수도 있었겠지만 우린 모르는 얼굴로 만났다.

단발머리에 큰눈, 통이 넓은 나팔바지에, 동그란 큰 귀걸이를 하고 환한 웃음을 짓는 그녀는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2층 화실로 오르는 나무계단은 좁고 낡아서 오르내릴 때마다 삐걱이는 소리로 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누군가 올라오고 있음을 알아 차렸다. 특히 높은 굽의 소리는 조금 특별해 나는 이미 그녀의 등장을 예견하곤 했었다. 우린 가끔 계단에서 부딪쳤고 가벼운 인사와 목례로 친해져갔다.

일년 남짓 후 서로를 많이 알아갈 무렵 우린 이대 입구 건너편 3층에 화실을 냈고 제법 많은 입시생들을 가르치며 학창시절의 마지막을 바쁘게 보냈었다. 졸업후 나의 시카고행은 본의 아니게 그녀에게 화실을 떠맡기게 되었다. 나는 짧지만 긴 날들 동안 새벽하늘을 보며 그녀의 배경으로 지는 붉은 저녁노을을 그리고, 잠자리에 들면서 이대 앞 화실문을 여는 그녀의 쓸쓸한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직장에서 늦은 밤까지 ESL코스를 마치고 돌아온 내 앞에 도착해있는 그녀의 편지와 사진은 힘든 삶을 이겨내는 큰 힘이 되었다. 시카고에 온지 두 해가 되던 해 우린 결혼했다. 그리고 올해로 꼭 40년이 되었다.

함께 한국 방문을 원했지만 스케쥴이 맞지 않아 부득불 내가 먼저 한국방문을 마치고 아내는 다시 한국 방문길에 오른 것이다. 나는 지금 오헤어 공항 출입문 앞에서 아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자동문이 열리면 트렁크를 밀고 백팩을 메고 걸어 나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멀리서 이곳까지 걸어나오는 사람들 속에 아내의 모습이 그려졌다가 사라지고 이내 문이 닫치고, 또 문이 열리면 이번엔 보이려나 목을 길게 빼고 행렬의 깊숙한 뒷편까지 꼼꼼히 체크해보지만 모두가 다른 얼굴이었다.

다시 문이 닫치고 안이 보이지 않는 문들을 바라보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여행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이 닫치면 도무지 안쪽을 가늠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우리도 살아가던 중 서로를 만나게 되고 앞을 볼 수 없는 긴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

때론 내가 아내를 떠나 아내가 나를 기다려준 적이 있었고, 언제인가는 아내가 나를 떠나 내가 아내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우린 날줄과 씨줄의 한 정점에서 만나 길고도 먼 길을 함께 걸으며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높은 절벽 앞에 설 때도 있었고, 너무 기쁘고 행복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바보처럼 실실 웃던 날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기적같이 만나 울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워하며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시카고 문인회장)

문이 열리고 눈앞에 아내의 모습이 보인다.
사십년 전 내 앞에 섰던 젊은 그녀의 모습이 겹쳐 내게로 온다.
난 두 팔을 벌려 아내를 안는다. 그녀도 내게 안긴다.
여행 같은 삶, 삶 같은 여행이 세월의 무게를 지탱하며
서로에게 안긴다. 모든 것이 정지된 오헤어 공항엔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만 가득히 채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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