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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흡 칼럼] 도라 도라 도라

1941년12월 7일 새벽, 일본 연합함대는 하와이 북서쪽 해상에 도착했다. 진주만 미 해군기지는 일요일 아침의 평온 속에 잠들어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일본군은 공격 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는데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이 한 척도 보이지 않는다는 최신 정보를 받았다.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태평양함대에 항공모함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렉싱턴, 새러토가가 소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요크타운은 미국과 영국 사이에서 출몰하는 독일의 U보트를 잡으러 대서양에 출동했다. 새러토가는 샌디에이고 해군 기지에서 정비를 받고 있었으며, 렉싱턴은 미드웨이 섬에 전투기를 배달하러 간 상황이었고,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 섬에 전투기를 배달하고 전날인 12월 6일에 진주만에 입항할 예정이었는데, 중간에 열대폭풍을 만나 이를 우회하느라 입항이 하루 늦어져 전부 진주만에 없었다.

나구모 제독은 미국이 공습을 눈치채고 항공모함을 진주만이 아닌 다른 곳에 배치한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으나, 미국 항공모함의 정보를 확인한 후에 움직일 정도의 여유가 없어 그대로 진주만 공격을 개시한다. 특수 잠항정을 탑재한 5 척의 잠수함들은 12월 7일 새벽 1시, 진주만 부근 10해리 해저에 도착해서 잠항정들을 모두 발진시켰다. 오전 6시 진주만이 있는 오아후 섬 북방 230해리 해역에 도달한 일본 기동부대는 후치다 미쓰오 중좌가 지휘하는 공격대 183기를 발진시켰다. 오아후 섬에서 방송하는 라디오 전파가 이들에게 진로의 안내역이 되어주었다.

미군에게 이미 레이더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일본 조종사들은 단 1기의 요격기도 보이지 않은 사실에 의아해하기도 하였다. 7시 49분. 제 1파 공격대가 진주만 상공에 도달했다. 99식 함상 폭격기를 조종하던 제1파 공격대 지휘관 후치다 중좌는 각기에게 전군 돌격명령을 하달했다. 전 공격대가 돌격 태세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치다는 후방석의 미즈키 일등병조에게 명령했다. “미즈키, 타전하라! 도라, 도라, 도라를!”
기함 아카기에 진주만 기습 성공을 알리는 신호였다. 후치다는 전군에 돌격명령을 내리고 자기도 전함 메릴랜드에 급강하 폭격을 가했다. 공격의 선두에 선 97식 공격기들은 기습 효과를 최대로 살려 최우선 목표인 전함들을 향해 집중공격을 퍼부었다. 8시 조금 지나 일본 가가 항모 공격대 97식 공격기가 투하한 800kg 폭탄이 전함 애리조나의 4번 포탑 측면에 명중했다. 이어서 1번 포탑과 2번 포탑 사이의 우현에도 폭탄이 명중했다. 애리조나는 전부(前部) 탄약고에 대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했다.

일본 해군 함재기들이 두 차례에 걸쳐 거의 완벽한 솜씨로 냉정하고 침착하게 목표물을 강타하는 동안 1차 공격대의 지휘관 후치다 중좌의 탑승기는 하와이 상공을 선회하면서 꼼꼼히 전과를 확인, 분석하고 있었다. 후치다 중좌는 두 차례의 공격으로 진주만내의 미 해군 주력함대와 하와이 주요 항공기지의 공군력은 거의 괴멸상태에 빠졌지만, 여전히 오아후 섬에는 일본 해군이 추가 공격해야 할 목표들이 남아 있다고 판단했다. 후치다 중좌는 기함 아카기에 3차 공격을 건의하는 전문을 타전했다. 저마다 화려한 전과를 안고 당당하게 귀환하는 공격대를 차례로 수용하며 기습 성공에 한껏 고무된 나구모 기동부대의 기함 아카기의 함교에서는 곧 열띤 논의가 벌어졌다.



그러나 나구모 제독은 이미 충분히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상황에서 함대를 온전히 보존하여 귀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 더 이상의 모험은 자제하기로 결정했다. 후치다 중좌의 건의와 일부 휘하 참모들과 지휘관들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2차 공격대를 수용하는 대로 즉시 하와이 근해를 빠져 나가도록 결정한 것이다. 하와이 기준 오후 1시 반을 전후하여 29대의 미 귀환 함재기를 제외한 모든 함재기를 무사히 수용한 나구모 기동함대는 해전의 방식을 완전히 뒤바꾼 진주만의 처참한 현장을 뒤로 한 채 당초 계획했던 대로 북북서로 침로를 돌려 귀환 길에 올랐다.

한편, 미군은 아무런 방어 준비태세가 안된 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미군의 피해는 엄청났다. 하루 동안의 공격에 2403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하고 1178명이 부상했다. 149대의 전투기가 지상 또는 함상에서 파괴되었다. 애리조나, 오클라호마, 테네시, 웨스트 버지니아, 네바다 등 미 해군이 자랑하는 항공모함과 전투함들이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 거의 비슷한 시각, 맥아더 장군 휘하 마닐라 주둔 미 육군 항공부대도 타이완에서 발진한 일본군 폭격기의 공격을 받아 궤멸의 비운을 맞았다. 이 와중에도 일본은 진주만 공격 2시간 전 미국에 선전포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음날 긴급 소집된 미 의회도 즉시 대일 선전포고를 결의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또다시 대전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하와이 진주만의 애리조나 기념관은 특이하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하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폭격으로 전함 애리조나호가 침몰한 곳에 세워졌다. 애리조나호는 승조원 1177명과 함께 수장됐다. 미국은 애리조나호와 희생자를 인양하지 않았다. 대신 그 위에 기념관을 세웠다. 일본을 용서하지만, 그 아픔을 잊지 않겠다는 미국인들의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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