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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꺼낸 '폭찹힐 전투'엔 역사 코드 숨어있다

6.25 휴전 직전 미.중공군 혈투 고지
소설.영화로 나와 미국인도 잘 알아
펜스 부통령 부친 참전해 무공훈장

"우리 양국의 동맹은 전쟁의 시련 속에서 싹텄고 역사의 실험으로 강해졌다. 인천상륙작전에서 폭찹힐 전투에 이르기까지 한.미 장병들은 함께 싸웠고, 함께 죽었고, 함께 이겼다."

지난 8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국회 연설에서 이렇듯 한.미 동맹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며 인천상륙작전과 폭찹힐 전투를 거명했다.

인천상륙작전은 더글러스 맥아더 당시 유엔군사령관이 5000대 1의 도박을 성공시키면서 전세를 역전한 전투로 이름 높다. 이에 비해 폭찹힐은 한국인들에겐 낯설다. 폭찹힐은 경기도 연천 비무장지대에 있는 천덕산 일대의 300m 고지를 가리킨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모양이 미국식 돼지고기 요리인 '포크촙(pork chop)'을 닮았다고 폭찹힐이란 별칭이 붙여졌다. 이곳에서 1953년 4월 16일 중공군 141사단 201연대 소속 한 개 대대가 이곳을 지키던 미 육군 7사단 31연대 E중대를 습격했다. 이후 밀고 밀리는 전투가 7월 6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중공군은 휴전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자 미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집요하게 공세를 이어갔다. 전사자만 중공군이 1500명, 미군이 347명 발생했을 정도로 치열했다. 미군은 결국 폭찹힐을 지켜냈다. 하지만 군사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전투 종료 5일 뒤인 7월 11일 이곳을 포기했다. 그리고 7월 27일 휴전이 이뤄졌다.



폭찹힐 전투는 펀치볼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등과 함께 6.25전쟁에서 벌어진 고지전 중 하나다. 규모로 봐서도 그리 크지도 않고, 승전이었다곤 하나 결과적으론 고지를 포기했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폭찹힐 전투를 왜 거론했을까. 그 이면엔 역사 코드가 숨겨져 있다.

①대중성=미국의 전쟁사학자인 SLA 마셜이 56년 소설 '폭찹힐: 1953년 봄 한국 전투에 참전한 미군 병사'에서 이 전투를 다뤘다. 이 책을 바탕으로 59년 영화 '폭찹힐'이 만들어졌다. 주연은 '로마의 휴일'에도 나온 그레고리 펙이 맡았다. 그러면서 미국인에게 널리 알려진 전투의 하나로 남았다.

영화엔 미군이 폭찹힐을 중공군으로부터 빼앗으면서 전체 중대원 135명 중 25명만 살아남는 모습이 그려졌다. 미군은 백병전까지 마다하지 않는데 사령부는 병력을 증원하지도, 고지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이 최근 북한과의 전쟁에 대비하려면 꼭 읽어야 할 도서로 추천한 '이런 전쟁'에도 폭찹힐 전투가 나온다.

이 책에선 "중공군이 미국의 의지를 시험하고 휴전 협상에서 양보를 얻어내려 무모한 공격을 계속했고, 상부의 무관심 속에서도 미군 중대가 혈투 끝에 방어에 성공한 전투"로 평가됐다.

②부통령=52년 45보병사단의 일원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에드워드 펜스 소위는 폭찹힐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워 53년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로부터 64년 후인 지난 4월 그의 아들이 한국을 찾았다. 바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다. 좌충우돌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듬직한 조언자인 펜스 부통령은 "아버지는 한국에서 복무하며 한국군과 나란히 전투에 참여했다. 이런 한.미 간 파트너십은 가족과 나에게 큰 자부심"이라며 "아버지가 받은 훈장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실제 그는 부친의 훈장과 훈장증, 훈장을 받는 모습이 담긴 사진 액자를 부통령 집무실에 뒀다. 그는 방한 기간 중 아버지가 전투를 치렀던 중부전선도 둘러봤다.

③중국=인천상륙작전은 한.미를 포함한 유엔군이 북한군을 상대로 펼친 것이었다. 그러나 폭찹힐 전투는 오로지 미군과 중공군의 일전이었다. 일부 한국군이 카투사로 참전했지만 말이다. 전투 마지막 6일간 미군에서 중대장 4명 등 243명이 전사하고 916명이 부상했을 정도로 맹렬했다. 이 중 163명의 유해는 끝내 찾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회 연설 후 바로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을 타고 중국으로 갔다. 한국에 한.미 혈맹 관계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중국에 미.중은 한때 적이었다는 걸 상기시키려는 게 그의 의도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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