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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전성기 대영제국, 왜 예술은 변방에 머물렀나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8/09/08 22:01

[더,오래] 허유림의 미술로 가즈아(9)

(문화전쟁의 시작 1751) 프랑수아 부셰, 발라프리하르츠 미술관(쾰른) [사진 허유림]


나체의 한 소녀가 소파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채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다. 짐짓 부끄러운 척하며 엉덩이를 드러낸 작품 속 하얀 살결의 여인의 이름은 루이스 오뮈르피다. 이 그림은 루이 15세가 아꼈던 당대 최고의 화가인 프랑수아 부세가 그린 것이었고, 19세 소녀인 루이스 오뮈르피는 왕의 정부였다.

그러나 이런 관능적인 매력을 강렬하게 뿜어내는 소녀나 신들의 성적 유희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데 전문이었던 화가들은 당시 사회 엘리트 계층의 퇴폐성을 자극한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눈요기에 불과한 부도덕성과 파스텔톤 색상으로 수 놓은 유희는 인간을 무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왜 이런 생각이 퍼져나가게 된 것일까.

1763년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파리 조약으로 영국은 해외 식민지 경영에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반면 영국과의 전쟁에서 참패한 프랑스는 캐나다와 인도를 내줘야 하는 굴욕적인 상황에 놓였다. 이에 프랑스인들은 거듭된 실정으로 믿음이 땅에 떨어진 루이 15세의 사치와 나태를 조롱했다. 눈요기 대상으로 전락한 미술의 타락에 대해 국가적인 문제 제기가 일고 있었다.

1763년 파리조약이후 힘찬 미술의 필요성 대두
자연스레 과자부스러기같이 예쁘고 연약한 그림이 아닌, 더 강하고 어둡고 힘찬 미술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귀족들은 자신보다 전장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많았던 선조들을 되새기면서 국가의 힘은 복원할 수 있다는 믿음이 퍼지고 있었다. 귀족의 쾌락과 향락을 주제로 삼은 로코코 미술이 막을 내리고 신고전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가 추구했던 질서와 비례, 조화로움을 계승한 신고전주의 그림은 단순한 구도와 붓 자국 없는 매끈한 화면, 절제된 표현이 특징이었다. 그 시작은 자크 루이 다비드였다. 시대는 다비드를 만들었고 다비드는 다시 시대를 만들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 자크 루이 다비드, 루브르 박물관(파리) ⓒpublic domain(공개도메인) [사진 위키피디아]


나폴레옹 황제 밑에서 궁정화가를 지낸 다비드는 장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를 제자로 두었다. 프랑스 회화의 전통을 스승으로부터 계승한 앵그르는 선을 회화의 기본요소로 보았다. 말하자면 드로잉을 먼저 하고 색을 선 안에 칠하는 것이다. 그는 한창 떠오르던 외젠 들라크루아의 양식이 대표하는 낭만주의에 맞서 아카데미의 정통성을 전적으로 옹호했다. ‘혁신가’가 아닌 좋은 예술체계의 ‘보존자’가 되려고 한 앵그르.

그러나 시대는 들라크루아의 손을 들어주었다. 선이 색과 색의 경계에서 절로 생기는 것으로 보고 색이 더 중요하다며 색의 자율성을 역설한 들라크루아는 그를 따르던 젊은 화가들이 회화의 새로운 통로를 여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들라크루아의 자율적인 색의 사용은 곧 출현할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회화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특히 빈센트 반 고흐와 폴 세잔이 들라크루아의 영향을 받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랑스 중심의 미술의 역사인 것이다.

영국보다 한발 늦은 산업화에다 1805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스페인 남서 해안 트라팔가르 곶에서 영국의 해군에게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어떻게 문화예술의 주도권을 계속 가지고 갈 수 있었을까.

문화와 예술은 경제와 정치적 힘에 따라 이동한다. 예를 들어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움켜쥐고 경제를 장악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뉴욕은 세계 문화와 미술의 중심으로 떠오르며 문화사를 다시 썼다. 이어 뉴욕을 중심으로 많은 예술사조가 탄생했다.

이렇게 볼 때 당시의 세계적 상황과 경제적 조건이라면 세계 문화사와 미술사를 주도하는 데엔 몰락한 나폴레옹 이후의 프랑스보다는 최고의 번성기를 누린 영국의 빅토리아제국이 더욱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문화사를 바꿀 4번의 기회를 놓친 영국
그러나 무엇이 프랑스로 하여금 어려운 상황에서도 문화예술사를 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인상파와 후기인상파를 태동시킬 수 있었을까. 그 답은 로열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영국 지식인들의 짧은 안목에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에 문화와 예술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변방의 위치에 남게 된다.

실제로 들라크루아의 색 표현 방식은 바로크 화가들과 영국 화가 존 컨스터블의 회화에서도 발견된다. 19세기 영국 미술계를 풍미한 존 컨스터블(1776~1837)은 서포크라는 시골에서 자라면서 형성된 소박한 시각으로 자연을 만나고, 그것을 화폭에 옮긴다. 동시대에 함께 활동했던 터너는 20대 초에 화려한 출발을 하고 로열 아카데미 회원으로 가입하며 많은 인기를 누리고 그림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반면 컨스터블은 냉대 속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로열 아카데미회원이 된다. 그러나 컨스터블은 영국보다는 파리의 화단에서 더 인정을 받았고 살롱 전에 출품했다.


(카오스 섬의 학살 1824) 외젠 들라크루아, 루브르 박물관(파리) ⓒpublic domain(공개도메인) [사진 위키피디아]


들라크루와가 살롱에 전시된 컨스터블의 그림을 보고 부족함을 느낀 나머지 자기 그림, ‘카오스 섬의 학살’에 흰색과 붉은색을 칠하기도 했다. 당시 자연을 새롭게 조명하던 프랑스에선 컨스타블의 그림을 선구자적 방법론으로 받아들이고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코로(Corot)에서 모네까지 이어지는 미술사에 그는 자연의 미적 방법론을 직·간접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컨스타불의 고국인 영국에선 그의 자연에 대한 신선한 접근법을 인식하지 못했다. 만약 컨스터블의 진가를 인식하고 그를 조기에 미술사의 주류에 편입시켰다면 아마도 시대를 역행하는 라파엘로 전파(라파엘로 전으로 돌아가자는 미술 사조)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바르비종파나 인상파는 프랑스가 아닌 영국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당연히 대영제국이 세계 미술사를 주도하는 이변이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영제국은 500여년간 세계를 지배한 거대 국가 로마제국처럼 특징 있는 문화와 예술을 일구어내지 못했다. 문화사를 쓸 4번의 기회를 눈앞에서 놓친 영국은 그렇게 미술사의 변방이 된 특이한 나라로 남아있다.

영국에서 인정받지 못한 컨스타불의 화법
그림값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답은 간단하다. 바로 국력, 즉 경제력이다. 세계 경제권을 확보했던 나라가 문화를 주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시대의 흐름을 읽고 받아들이는 안목이 있어야 가능하다. 지식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씨실과 날실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지성이다.

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를 돌아보면 몇몇 영국 작가가 그린 그림들이 걸려있다. 영국의 풍자화가 윌리암 호가쓰, 초대 로열아카데미 원장이었던 조수아 레이놀즈, 그와 쌍벽을 이루며 경쟁했던 토마스 게인즈버로우, 윌리암 터너와 존 컨스타블 등의 작품이 자랑스럽게 걸려있다.

그러나 데이트 브리튼 갤러리에 전시된 라파엘로 전파의 화가들의 그림은 한 점도 보이지 않는다. 프랑스에 인상파 그림을 보러 간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영국에 라파엘 전파 그림을 보러 간다고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이유가 이것이다.

이는 다시 미술시장에서 가격으로 증명된다. 2017년 6월 소더비에서 72만8750파운드(한화 약 10억원)에 낙찰된 컨스터불의 작품과는 대조적으로 들라크루아의 작품은 1998년 6월 710만 유로(한화 약 92억)를 기록했다. 누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무색할 정도이다.


좌) Landscape With a RED-RILED COTTAGE, A windmill and a rainbow 1820년 경 존 컨스타블, 캔버스에 유채 [출처 소더비], 우) Choc de cavaliers Arabes 1833-1834 외젠 들라크루아, 캔버스에 유채 ⓒpublic domain(공개도메인)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국가 간의 문화 전쟁은 이미 오래전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이 전쟁에선 개인이 하나의 브랜드가 돼 가치를 생성해 내야 한다. 다음 호에서는 아담스미스와 케인즈 경제 이론을 거부한 이상한 미술 시장의 논리를 통해 가치가 시대를 어떻게 반영하는지 알아보겠다.

허유림 RP' INSTITUTE. SEOUL 대표 & 아트 컨설턴트 heryu1229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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