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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친 고기 아까워마라…월척 또 온다”

고수를 찾아서 <10> 이삼웅 사우스힐회장
“물때는 기다려야 온다
열정 잃지않으면 고수”

이삼웅 회장은 40여 년간 낚시를 해왔으면서도 월척들고 찍은 그 흔한 사진 한 장 없다. 잡은 고기 들고 찍는 낚시꾼들은 하수란다. 급한 대로 낚시대만 들고 웃어 보였다. 대신 여기저기 뒤져서 찾은 월척 사진 한장을 줬다. 40.9cm의 ‘화이트 퍼치’다.

이삼웅 회장은 40여 년간 낚시를 해왔으면서도 월척들고 찍은 그 흔한 사진 한 장 없다. 잡은 고기 들고 찍는 낚시꾼들은 하수란다. 급한 대로 낚시대만 들고 웃어 보였다. 대신 여기저기 뒤져서 찾은 월척 사진 한장을 줬다. 40.9cm의 ‘화이트 퍼치’다.

위기 때 바다 찾는 40년 낚시꾼
72년 도미…한인 최초 모피업체
11·21대 LA한인회 이사장 역임
85년 타운에 짓던 쇼핑몰 포기
낚시로 맘잡고 매입한 모텔 적자
3년 전 ‘주택 리모델링’ 재도전


‘월척(越尺)’은 넘을 월, 자 척을 쓴다. 한자(30cm)가 넘는다는 의미다. 30.3cm의 대어는 낚시꾼들에게 크기의 척도만은 아니다. 물때를 가늠하는 지식과 기다리는 인내, 풀고 감는 기술이 녹아든 열매다.

LA한인회 11·21대 이사장을 지낸 사우스힐개발사의 이삼웅(76) 회장은 40여 년간 그 열매 낚는 재미에 빠져 살았다. 돌아보면 바다는 그에게 피난처였다.

78년 석유파동으로 일자리를 잃었을 때도, 85년 LA한인타운에 쇼핑몰을 짓다가 두 손 들었을 때도, 200만 달러를 투자한 모텔을 2008년 포기해야 했을 때도 바다를 찾았다. 그때마다 건져 올린 건 희망이라는 월척이었다. 이민생활 거의 50년이 되어가는 지금, 그는 최고의 월척을 기다리고 있다.



#월척 1호, 미국

해방 전년 경북 고령군 덕공면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 둘에 첫 아들을 본 아버지는 기뻐하면서 이름에 석삼(三)자를 붙였다고 한다. 집안의 기둥이었던 아버지는 한국전쟁 나던 해 북한군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 어려운 형편에 어머니, 누나들과 지게 지고 스무 마지기 땅에 농사를 지어야 했다.

공부는 잘했다. 예동국민학교, 고령중학교에서 1, 2등을 놓치지 않았다. 대구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때다. 선생님이 칠판에 미국의 인공위성을 설명해주셨는데 ‘풍전등화 한국을 구해준 나라’는 단숨에 동경의 대상이 됐다.

미국에 가고 싶었다. 먼저 군필자가 되어야 해외에 나갈 수 있었다. 대학을 미루고 공군(116기)에 입대해 3년 꽉 채워 복무했다. 제대 후 신촌으로 상경해 입시준비에 매달렸다. ‘시험에 떨어본 적 없는’ 자신감은 주효했다. 64년 고려대학교 역사과에 입학했다. 미국 갈 길을 지도교수에게 물었다. 켄터키주 후배 교수를 찾아가라 연결해줬다. 71년 100달러를 들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월척 2호, 모피

‘브레시아칼리지’가 있는 켄터키주 오언스버러(Owensboro)는 시골동네였다. 믿고 찾아갔던 교수는 반기지 않았다. 대놓고 나가라고 눈치를 줬다. 막막했다. 한국에서 만난 미국인 친구가 떠올랐다. 모르몬교 선교사 스티브 가드너는 “미국서 도움 필요하면 우리 아버지를 찾아가라”고 했다.

가드너의 부친에게 전화했다. ‘흔쾌히 오라’는 말에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탔다. 꼬박 사흘 반이 걸려 LA에 도착했다. 아들의 방을 내줬고 다음날부터 ‘일하러 가자’고 했다.

건설 컨트랙터였던 친구 부친은 그에게 공사현장을 살갑게 가르쳤다. 시골에 살았으니 고치고 만드는 손재주가 있었다. 목수일은 그에게 자연스러웠다. 바닥기초, 골조, 미장, 마감까지 꼼꼼히 배웠다.

시간당 수당 1.75달러를 받다가 3년 만에 5달러로 월급이 올랐다. 당시 싱글아파트 렌트비가 50달러 할 때다. 은행계좌에 돈은 쌓였지만 신분을 해결할 수 없었다.

육군이 되면 영주권을 준다는 말에 75년 입대했다. 베트남전쟁 막바지였던 때라 파병도 각오해야 했다. 훈련 중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11개월 만에 의병제대했다. 다시 친구 부친집으로 갈 수 없었다. 다행히 대한항공에 취직했다. 화물 서류작성을 맡아 ‘이제 좀 살겠구나’ 싶었다. 그러다 2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6개월 만에 실업자가 됐다.

또 막막했다. 솟아날 구멍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대구 사는 고모가 밍크코트를 구해달라며 3000달러를 송금했다. 다운타운 모피도매상에 갔더니 1000달러면 살 수 있었다. 기회가 퍼덕였다. LA한인타운 최초의 모피가게인 ‘반도모피’를 열었다.

“더운 LA에서 모피장사가 웬 말이냐고 더위먹었다고 다들 놀렸지. 그때 한국에서 밍크코트 수요가 폭발적이라는 걸 다들 모르고 한 말이었어.”

일명 ‘김치 GI’로 불리는 한인 미군들은 밍크코트가 한국에선 목돈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국 파병 나갈 때 하나씩 들고가니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많게는 하루 3만 달러까지 벌었다.

부동산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한창 많을 때는 18채까지 갖고 있었다. LA한인타운 올림픽가에 쇼핑몰을 짓기 시작했다. 건축을 알고 돈도 있었으니 망할 리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융자없이 가진 현금만 퍼부은 게 화근이었다. 채무불이행 경고장이 쌓이기 시작한 85년, 건물을 포기했다.

#월척 3호, 호텔

낙심에 낚시에만 매달렸다. 바르르 손맛에 잡념이 사라졌다. 해가 조금이라도 수평선에 걸려있으면 바다로 갔다. 물때를 익히면서 기회는 또 온다는 자신감도 다시 얻었다.

한국 양평, 가평 등에서 목조주택 짓는 붐이 일 때다. 서울에서 우연히 집짓는 강의를 한 번했더니 수십 명이 몰려왔고, 책을 썼더니 잘 팔렸다.

4~5년간 한국에서 돈을 제법 모았다. 100만 달러를 들여 미주리주에 방 180개짜리 모텔을 샀다. 땅만 10에이커 넘는 알토란같은 ‘은퇴자산’이었다. 호텔로 업그레이드하면 걱정없이 살 수 있겠다 싶었다.

낡은 카펫 떼어내고 페인트 칠하고 땀흘려 리모델링했다. 아들에게 운영을 맡겼지만 사업에 재주가 부족했다. 100만 달러를 더 투자했는데도 적자는 쌓였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졌고 손을 들어야 했다.

바닷가 갯바위에서 칩거가 다시 시작됐다. 여러 번 엎어졌지만 아내는 잔소리 한번 안 했다. 85년 간호사가 돼서 아직도 LA한인타운 인근 올림피아 병원에서 근무한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다시 공사현장으로 돌아갔어. 3년 전부터 ‘플리핑(Flipping·낮은 가격에 주택을 구입해 리모델링 한 후 되파는 투자)’을 시작했지. 2년만에 100만 달러 수익을 봤어. 다시 입질이 오고 있어서 스릴이 넘쳐.”

#최고의 월척, 인생

-놓친 고기(기회)가 많았다. 아깝지 않나.

“그게 인생 아닌가. 잡았다가도 놓치고…. 일흔이 넘었는데 지금도 ‘그때 안 그랬더라면’ 후회를 한다. 이미 늦은 후회해봤자다. 고기는 또 온다.”

-낚시는 무엇인가.

“한 자루다. 낚시가면 빈손으로 돌아오는 때가 거의 없다. 고기가 안 잡히면 홍합이라도 한 자루 담아온다. 낚시는 내게 항상 풍성한 행복이다.”

-어떤 고기를 잡나.

“주로 흑돔이다. 손맛이 좋다. 다른 고기는 배타고 바다로 나가야 하지만 흑돔은 언제라도 갯바위에만 나가면 잡을 수 있다. 또 대화가 가장 잘 통하는 고기다.”

-고기와 대화도 하나.

“물론이다. 고기가 입질하면 '아, 네가 왔구나. 오랜만이다. 며칠 못 왔는데’ 중얼거린다. 입질이 계속된다는 건 고기가 ‘밥(미끼) 더달라’는 말이다. 낚시는 고기와 싸움이면서 교감이다.”

-얼마나 많이 잡아봤나.

“하루 80마리까지 잡아봤다. 파도가 심한 날이었는데 갯바위 사이 웅덩이에 고기들이 갇혔다. 낚시를 던지기만 해도 정신없이 건졌다.”

-가장 큰 월척은.

“3년 전 바하캘리포니아에서 1.5m짜리 ‘은대구(Black cod)'를 잡았다. 원래 큰 어종이 아닌데 그날 운이 좋았나보다. 처음엔 수초에 걸린 줄 알았는데 줄을 감으니 ‘크다’ 직감이 왔다. 20분간 씨름을 벌이다 끌어올렸는데 상어만큼이나 컸다.”

-웬만한 월척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텐데.

“고기 욕심은 없어지지 않는다. 튜나와 황새치를 잡아보는 게 꿈이다. 특히 쿠바에 가서 황새치를 잡아보고 싶다.”

-고기 잘 잡히는 낚시 포인트 추천해달라.

“안 가르쳐준다. 다들 올까봐.(웃음)”

-사고를 당한 적 있나.

“난 없지만 10년 전 내 친구가 포인트무구 갯바위에서 낚시를 하다가 파도에 휩쓸려 죽었다. 그 친구는 항상 바다에 대해 자신했다. 해군특전사 출신이라고 바다를 잘 안다며 구명조끼를 입지 않았다. 이 기회에 꼭 말해주고 싶다. 낚시할 때 반드시 구명조끼 입어라.”

-낚시클럽을 운영한다.

“10여 년 전 ‘퍼시픽피싱클럽’을 만들었는데 회원 수는 200명 정도다. 매달 두 번 물때 맞춰 음력으로 15일, 30일 전후로 모인다. 주로 팔로스버디스 절벽 아래 갯바위로 간다. 사람도 없고 낚시하기 좋은 천국이다.”

-인생과 낚시는 닮았다고들 한다.

“낚시에 물때가 있듯 인생에도 때가 있다. 고기(성공)를 잡으려면 물이 가장 많이 들어온 만조와 빠져나간 간조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물때에 맞춰 낚시를 던져야 하고, 고기가 물었다면 주저 말고 낚아채야 한다. 진짜 싸움은 그때부터다. 낚싯줄이 끊어져 다잡은 고기를 놓치지 않도록 감고 풀고 조절해야 한다. 월척은 때를 알고 기다리되 서두르지 말아야 잡힌다.”

-낚시의 고수란.

“항상 바다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바다 열병(sea fever)’이라고 한다. 파도소리, 짠내를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그 열정만 있다면 누구든 고수가 될 수 있다. 설사 오늘 잡지 못했다 해도 내일은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 지금 빈털터리라고 평생 가난하리라는 법 없다. 요즘 주택 플리핑에 재미를 보고 있다. 미국 온 지 거의 50년 만에 경제적으로 최고의 손맛을 느끼고 있다.”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chung.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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