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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칼럼] 내 인생의 코스프레

햇살이 눈부시게 밝은 오후, 마켓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파킹랏에서 일방통행 도로로 들어서려고 막 우회전을 했는데 갑자기 “빵!” 경적이 울렸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옆 차 승객석 쪽 차창에서 뻗어 나온 두 손이 내 차를 향해 손가락질을 해대고 있었다.

“어, 이거 뭐지?” 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순간적으로 아하, 맞다. 차가 달릴때 옆 선으로 다른 차가 들어오면, 그 차가 내 차에 부딪힐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 더구나 내 차는 큰 밴 트럭이니까 작은 차의 운전자가 매우 놀랐겠다 싶어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미안함’의 제스처를 보냈다. 그러나 그 차는 계속 내 차 옆에 붙어서 따라왔고 급기야 남자는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는 내 차를 향해서 계속 욕을 해 댔다.

희뜩거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쉬지 않고 욕지거리하는 남자의 행태를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가 정말 드라마 속 장면처럼 내 차를 가로막고 서서 총질하는 거 아닐까? 옆으로 샐 수 있는 길도 없는데 어쩌지? 이 상황을 녹화해 둘까, 911에 당장 신고할까, 여러 생각이 스쳤지만, 어떻게든 그를 진정시키는 것이 먼저라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우선 내 차의 속력을 천천히 줄이면서 차창을 완전히 내렸다. 그리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었다. 나를 본 그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내 얼굴이 예뻐서는 아니었을 테고, 아마도 밴 트럭 운전자가 중늙은이 여자라는 것에 당황한 듯했다. 나는 그에게 입술의 움직임으로도 알아챌 수 있도록 또박또박 “아이 엠 쏘리.”라고 웃으며 묵례를 했다. 그의 표정이 순간 바뀌었다. 내 차를 향해 휘젓던 그의 두 손이 쑥 사라졌다. “땡큐!” 다시 한번 그를 향해서 거수경례를 올렸다. 겸연쩍은 듯 그가 급히 차창을 닫았다. 그가 탄 차는 줄행랑치듯 속력을 내기 시작했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두려웠던 상황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끈질기게 쫓아오며 손가락 욕설로 으름장을 놓던 그의 태도가 갑자기 수그러든 것은 공손하게 사과하는 모습을 연출했던 내 행동 때문이었을까, 나약한 여자는 보호해야 한다는 그의 가부장적인 사고방식 때문이었을까.

‘코스프레’라는 신조어가 있다. 영어 ‘코스튬 플레이(Custom Play)’를 일본 사람이 줄여서 만든 ‘코스플레이(Cos Play)’ 란 용어의 일본식 발음이다. 원래의 의미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의 의상을 입고 모여 노는 놀이문화를 일컫는 말이지만 요즘은 위장이나 가식으로 진품을 모방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얼마 전 사소한 오해로 2년 전에 헤어졌던 지인을 우연히 만났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지인과 나 사이의 오해를 풀어주겠다고 자청했던 친구와 지인이 지금까지도 계속 만나고 있다는 거였다. 그때 친구가 해결사를 자청한 후, 결국 지인과 나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었다. 생각해 보니 친구와 내 관계가 끊어졌던 것도 역시 그때였던 것 같았다. 배신감에 마음이 쓸쓸했었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친구의 좋은 모습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에 실망했고, 내 마음에 상처로 남았다.

사람의 느낌이 글이나 말로써 백 퍼센트 전달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때로는 조급한 생각에서 어떤 행동이나 행위로서 상대의 감정을 진하게 터치하고 싶을 때가 있다. 두려움에서 빨리 벗어나고픈 나머지 도로 위에서 ‘착한 여자 코스프레’를 했던 나의 행위가 그러했듯이, 자신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친구도 내게 ‘좋은 친구 코스프레’를 했었을 것이다. 그래,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으랴. 어차피 누군가의 모습을 좇아 사는 것이 사람의 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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