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삶의 향기] 악기점 청년 ‘JOE’

수필가 김혜경

잿빛 먹구름이 꾸물대는 오후, 수리를 맡겼던 기타를 찾으러 악기점에 들어섰다. 며칠 전 찾으러 갔을 때 기타 줄만 새로 갈아 놓았을 뿐, 정작 고쳐야 했던 곳은 손도 닿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속에서는 벌써 짜증이 일었다. 아직도 고쳐져 있지 않으면 어쩌나, 내일 꼭 기타를 써야 할 일이 있는데, 하는 걱정을 하며 들어선 악기점은 한산했다. 종업원 서너 명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힐긋 쳐다만 볼뿐 내게 관심 어린 시선을 주는 이는 없었다. 하기야 중년을 훌쩍 넘긴 동양 여자가 전자 악기를 살 확률은 거의 없을 테니 그럴 수도 있겠다.
수리를 담당하는 장소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문득, 나를 쳐다보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이미 내 쪽을 향해 발걸음을 떼고 있던 청년이 금세 내 곁으로 다가와서는 공손하게 물었다. “ What can I help you, Mam?” 사정을 이야기하며 영수증을 내미니, 물품 보관소에서 내 기타를 찾아서 꺼내 왔다. 기타는 여전히 수리되지 않은 채였다. 낙심한 내 표정을 보고는, 큰 문제가 아닌 듯하니 자기가 손봐주겠다고 했다. 네 담당도 아닌데 괜찮겠냐는 내 질문에 그의 대답은 “ It’s okay, no problem.”
살다 보면 처음 보았어도 그냥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말과 행동에서 왠지 신뢰감이 꿀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 그가 그랬다. 갓 스무 살 정도의 해말쑥한 청년이 어쩌면 그리 신중한 태도로 손님을 대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그 악기점을 거의 5년 넘게 들락거리는 동안, 나이든 종업원이 아니면 아무도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기에 상냥한 백인 청년의 태도가 내겐 신기하게 느껴졌다.
에어컨 바람이 돌고 있는데도 비지땀을 흘리며 내 기타와 씨름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점점 더 고마움이 커졌다. 요리조리 살피며 몇 번을 더 확인하고 튜닝까지 끝낸 기타를 넘겨받으면서는, 나한테 저 나이 또래의 딸이 있다면 미래 사윗감으로 점찍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 그렇지. 언젠가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늙을수록 입은 다물고 지갑을 여는 것.’이라고.
기타 수리비를 계산할 때, 20달러 짜리 지폐 한 장을 더 얹었다. 팁이라는 내 말에 쌍꺼풀진 그의 눈이 확 커졌다. 손사래 치며 거절하는 청년에게 휴식시간에 시원한 음료수라도 마시라고 하자,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라고 했다. 또렷한 한국말이었다. 어머나! 이번엔 내 입이 쫙 벌어졌다.
“ My mom is Korean.” 그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다시 말했다.
그랬었구나. 그래서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도와주려고 달려왔구나. 입 한번 벙끗하지 않았는데도 담박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아본 그에게 한국 사람은 모두 자신의 엄마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존재였으리라. 나를 돕고 싶어했던 그의 마음과 흘린 땀의 노력이 그에게 주었을 행복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가슴 속으로 싸한 감동이 밀려왔다.
밖에서는 갑자기 퍼붓던 소낙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비 내리는 모습을 보며 기타가 비에 젖을 것을 걱정하던 그가, 내 차를 출입구 가까이 가져오라고 했다. 빗줄기를 뚫고 파킹랏으로 뛰어가 차를 타고 악기점으로 돌아가는데, 문 앞에서 기타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기다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그에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외국인으로 살면서, 나는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는 내가 갖고 태어난 것들의 존재를 부정하기보다는, 저 청년처럼 내 피에 내 뼈에 보이지 않게 새겨진 것들의 가치를 더 귀중하게 여겨야 했지 않았을까.
차 뒷좌석에 기타를 넣어주려 그가 몸을 구부리자, 셔츠 주머니에 가려져 있던 이름표가 비죽이 얼굴을 드러냈다. 거기에는 까만 글씨로 “JOE”라고 쓰여 있었다.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