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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그레이 칼럼] 은총이 가득한 작은 성전에서

요즈음 가톨릭 교회는 성찰의 시간을 가진다. 2002년 보스턴에서 일부 사제들의 성폭행과 가톨릭 계층의 조직적인 은폐 사실이 들어나 전국을 발칵 뒤집었던 충격이 어느정도 진정되나 싶은 시점에 다시 펜실베니아주에서 2년동안 가톨릭 교구의 실태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70년 동안 300명이 넘는 문제 사제들로 피해를 본 아이들의 숫자가 1000명이 넘는다는 엄청난 사실에 언어를 잊는다.

인류역사의 시작부터 신앙은 절대적인 파워를 가지고 도덕의 지침으로 사람살이에서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며 교통질서를 해줬다. 특히 하느님의 대행자인 성직자의 권위에 신자들은 믿음을 갖고 순종한다. 성폭행을 당한 어린아이들이 받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나. 이런 일은 가톨릭 신자로서 부끄럽고 한편 슬픈 일이다.

며칠 전 NPR을 통해서 자신도 피해자이며 같은 피해자였던 친구가 자살한 후부터 공개적으로 교계에 화살을 던졌다는 한 펜실베이니아 의원의 인터뷰를 들었다. 이어서 전국 여러 주들이 성직자를 상대로 수사에 나섰다. 이런 미국의 어지러운 상황에 이어 세계 곳곳에서 사제들의 성추행 문제가 쏟아져 나오니 로마 가톨릭교회가 휘청거린다. 최근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문제를 근절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런 일련의 상황에 그러잖아도 만연한 반가톨릭 정서가 사람들의 마음에 편견을 줄까 두렵다. 더불어 잘못을 저지른 사제만 아니라 모든 사제들에게 회의의 시선을 주는 일이 마녀사냥이 아니었음 좋겠다.

창세기에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에게 남녀 성생활의 축복을 주셨다. 그후 성과 결혼관이 성립되었지만 로마제국의 멸망 후 유럽에서 시작된 중세기에 성도덕이 문란해지면서 교회도 세속화되어 타락하자 16세기에 수사였던 마틴 루터가 95가지 조목을 들고나와서 교회의 잘못을 고발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면직을 당했고 그의 행위는 종교개혁의 시작이 됐다. 사제도 결혼해야 한다고 강조한 마틴 루터 자신도 수녀와 결혼해서 7명의 자녀를 뒀다. 어쩌면 가톨릭 사제들에게 결혼을 허용했던 과거를 다시 고려해볼 필요가 진실로 인간적인 측면이 아닐까 싶다.



미사 시간에 사제는 교구에서 성문제를 일으키는 성직자나 봉사자를 골라내고 교회의 질서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한번도 아니고 연거푸 주말에 신도들의 마음에 안정감을 심어주려는 사제의 설명은 정면돌파를 선언하는 교구의 노골적인 노력이다. 신앙의 본질을 의식하니 그동안 여행 다니면서 본 성령이 충만했던 작은 성전들이 떠올랐다. 그중 언제나 나에게 깨우침과 축복을 주는 성지, 몽고메리에서 100마일 거리에 있는 작은 성전이 그리워 불쑥 그곳을 찾아갔다.

1915년 북부에서 빈센시오회 신부인 토마스 져지 신부님이 남부로 발령받아왔다. 선교가 목적이었던 그가 교인들과 힘을 모아 피닉스시 가까이 있는 농장에 1917년에 세운 채플은 오두막집이다. 간소한 제단과 투박한 목조 건축물 나무결 어디에나 그의 땀과 기도가 배여 있다. 삐걱이는 바닥이나 나무의자들이 하나같이 믿음의 기본을 일깨운다. 전세기 신도들이 제단에 바친 영적 믿음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푸근함을 주는 작은 성전의 내부는 화려한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림이 전하는 엄숙한 스토리보다 알찬 이야기로 정겹다. 한쪽 벽 창문을 통해서 밖을 보니 환한 세상, 고목의 줄기에 치렁치렁 매달려 바람 따라 춤추는 스페니쉬 모스 또한 평안을 준다.

‘신성한 삼위일체의 성지’인 채플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숭고한 삶을 살며 사제의 직분을 수행한 져지 신부님을 기린다. 그가 보여준 믿음의 불길을 쬐며 헌신과 기도로 평신도의 기본이 되어준 그의 체취를 강하게 느낀다. 오래전 처음 신앙에 귀의하던 마음자세를 되살림과 동시에 져지 신부처럼 사제의 직분에 충실한 많은 정결한 사제들이 있음을 상기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성폭행 하는 것이 어디 가톨릭 사제들 뿐일까. 권력과 지위를 남용하는 사람들이 은근슬쩍 많다. 다행히 피해자들의 신음소리가 조금씩 침묵의 벽을 깨뜨린다. 권위자들의 성폭력에 대항한 ‘미투’ 움직임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다. 보스턴 사건 이후 15년이 지났다. 하지만 시간은 약이 아니었다. 가톨릭 교회의 보수성과 계층 구조에 변화를 기대하며 성전에 무릎 꿇고 피해자들과 사제들을 위한 기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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