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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기고] 북에 있는 언니를 그리워하며

정희자(화가 문인)

북에 계신 언니에게. “언니” 하고 북쪽 하늘을 향해 불러봅니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됐을까요. 그리워하며 살아 온 지가 한 평생, 60여 년이 되니 이제 잊을 만도 한데 오히려 더욱 간절하게 소식이 알고 싶고,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다면 사실 만이라도 확인 할 수만 있어도 위안이 되겠습니다.

긴긴 일생이 잠깐 사이에 흘러가고 죽을 날이 코 앞에 닥치니 그간 어찌 참고 살았는지 요즘에 더욱 그립습니다.

언니, 얼마나 외롭게 사셨어요. 네형제 중 세사람이 다 남쪽에서 사는 동안 엄마를 홀로 모시고 외롭고 애달프게 지내셨겠지요.



헤어짐이란 시간이 약이라고, 오래 가면 잊는다고 했던가요. 그것은 남과의 만남을 말하는 것이지, 피를 나눈 형제가 세월 지난다고 잊혀지겠습니까.

헤어진 십대의 아름다운 그 모습만 기억할 뿐 지금의 늙은 모습은 상상이 안 갑니다. 나이든 언니의 손이라도 만지며 그간의 긴 세월 이제라도 만나서 서로 확인할 수 만 있다면 저의 한이 풀리겠습니다.

세월이 우리를 이같이 갈라 놓은 한을 어디에 대고 풀겠습니까.
누구를 통해서라도 제가 아직 살아서 미국땅에 정착해 있다는 말만이라도 전해지는 기적을 바라면서 이 글을 써봅니다. 언니, 강원도 양구 정돈수의 딸 정병란이를 동생 희자가 육십 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쪽에 계시던 아버지와 오빠도 다 나이 들어 돌아가시고 일가 친척도 우리 세대는 거의 다 가고 조카들만 있습니다. 과거의 어느 역사에도 이렇게까지 꽉 막혀서 소식도 모른 일은 없었던가 합니다.

북에 있을 때 제 나이 열 세 살에 할머니 돌아가신다고 온 친척 다 모여 운명하는 것을 지켜볼 때 저는 윗방에서 짐을 꾸려 오빠가 장사 지낸 후에 다시 춘천도청 근무지로 돌아갈 때 당돌하게도 따라 나서서 공부하겠다고 한 것이 영영 이별이 되었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공부하던 언니가 마땅히 나서야 하는데 저에게 양보했지요. 둘 다 나서면 오빠에게 부담된다고 양보하셨지요. 가끔 그 시절을 생각하면 언니에게 양보 받은 것이 고맙고도 두고두고 미안합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 이 막내 딸과 오빠를 얼마나 그리워하셨을까. 언니 혼자 애쓰신 것을 보지 않아도 압니다.

언니, 학창 시절 일본에서 공부하던 오빠와 서울에서 공부하던 언니가 늘 선물 보내주셔서 신기 한 선물을 많이 받던 생각이 생생한데 이렇게 소식도 모르고 일생을 산 것이 모두 꿈 같습니다. 이러다가는 저 세상에서나 만날까 하는 슬픈 마음이 듭니다.

서로 만나고 편지도 주고 받은 이도 있는데 어째서 우리 친척들은 한 사람도 소식이 없을까요.

사촌 오빠들의 교육이 높으니 그 쪽에서 벼슬도 했으련만 한 사람도 소식을 모릅니다. 부모님들이 아끼시던 토지는 다 이남으로 삼팔선이 그어져 오빠네 조카들이 갖고 있습니다.

언니 오래 오래 사셔서 죽기 전에 한번 만나는 야무진 꿈을 버리지 않게 되길 간절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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