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조소현 문학칼럼: 그 이름은 시작

-영어로 쓰기에 대한 두려움-

“아무렇게라도, 그 결과가 어찌되었든 일단은 말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하는 당신의 목소리에서 쉰 소리가 날 수도 있습니다. 혹은 당신은 그저 그 목소리 자체가 마음에 안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유일한 수단입니다. 당신이 갖고 있는 유일한 목소리는 그것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건 싫건 일단은 그 목소리를 사용하여 말을 하십시오. 만약 당신이 그 목소리가 싫거나, 혹은 유려한 말하기를 하고 싶은데 처음부터 되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하면 안됩니다. 말을 하고 하고 또 하다보면 누가 아나요. 어느새 당신이 자신의 목소리를 좋아하게 될지도요. 중요한 것은 말하기를 시작하지 않으면 아마 당신은 목소리를 영영 내지 못하거나, 자신만의 목소리를 갖는 것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교수님은 위와 같은 말을 하면서 이는 글쓰기에 관한 유명한 학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라고 했다. 저 단락의 마지막 문장을 들으니 아하! 하는 순간이 왔다. 이 인용에서 ‘말하기’를 ‘글쓰기’로 대체하면 저건 딱 내게 하는 말이었다. 영어로 글쓰기가 꺼려진다고 쓰기를 미루고 또 미루다 보면 영영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오히려 나를 영어 쓰기에 좀 더 적극적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떠 밀었다. 30대에 이민 온 내게 영어로 쓰기는 뭔가 마음에 껄꺼름함이 남아있는 즐겁지 않은 글쓰기였다. 한국에서 국문학 석사를 할 정도로 한국어로 쓰기, 한국 문학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는데, 같은 언어임에도 한국어에서 영어로 그 언어가 바뀌었다고 이렇게나 나의 언어 사랑이 변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 자괴감이 들었다. 영어라는 언어에 대한 내 달콤한 애정을 키워보고 싶었다.

#영어에 대한 애증의 여정



영어로 말하기는 영어로 쓰기에 비해 쉽고 재밌었다. 사람들을 직접 만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교성이 강한 내게는 큰 부담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말하기’에도 다양한 얼굴이 있다.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는 말하기, 그룹으로 모여서 말하기, 그룹으로 말하기에도 그 장소가 교실인가 회사인가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영어 스피치 모임을 꾸준히 가고, 일에서 영어를 쓰면서 이제는 영어에 담긴 나의 러시아어 엑센트에 대한 컴플렉스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그래, 그러면 어떠냐! 내 발음이나 엑센트가 다르다고 해서 당신이 못 알아 듣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럼 됐다. 언어의 기본은 의사소통이지 않던가.

이제는 영어로 말하기를 넘어 영어로 쓰기에 대한 나의 애정을 키워야 할 차례다. 영어로 쓰기…… 아, 저 어려운 이름…… 이력서를 쓰거나, 공식 문서를 쓸 때 남편의 도움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1세부터 이 곳에서 산 남편의 영어는 네이티브이고 깔끔하며 ‘크리스탈 클리어Christal Clear’ 크리스탈 유리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고 명료하다. 그래서 내가 쓴 영어가 그의 손을 거치면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 나는 언제 저 수준을 따라가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는 마치 내가 부엌에서 이리 저리 뚝닥뚝닥 요리를 해서 스스로 배워 나가며 요리에 대한 즐거움을 맛보아야 하는데, 갑자기 고급 식당 쉐프님이 내 부엌을 점령하고 나의 요리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잔소리를 해대며 내 요리 결과물과 자신의 명작에 가까운 요리를 비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 이제는 나만의 요리를 만들 차례다. 그런데 나는 사실 마음이 웅크러져있어서 ‘내 요리는 형편없을거야’라고 생각하고 만 꼴이었다. 이 웅크린 마음을 이 글의 첫 문장인 인용구가 조금씩 펴 주었다. 그래, 무엇이 그리 어려울게 있을까. 영어로 말하기와 글쓰기가 뭐 그리 또 다를까. 이런 마음이 사월의 새싹처럼 나기 시작했다.

#새싹처럼 핀 마음, 결코 결석하지 않으리

내가 사는 아파트는 일종의 주상복합 건물이다. 나는 이 층에 살고, 일 층에는 일종의 ‘마을 도서관’같은 공간이다. 그 곳에는 책이 있고, 그 책들을 읽을 수 있는 소파가 있으며, 각종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프로그램 중에는 ‘Drop In and Write’이 있었다. ‘그냥 들어와서 쓰세요.’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까? 매주 한 번씩 오후 다섯 시 부터 약 한시간 정도 이뤄지는 프로그램이었다. 지난해 팔월 이 곳으로 처음 이사를 오고 나서 이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아는 순간, 마음은 ‘바로 이 곳에 가야지!’ 했는데 몸과 마음의 분리는 이런데서 오는 것이었다. 마음은 ‘가자!’를 외쳤지만, 왜 그렇게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이 마을 공동체 도서관에서는 내게 유익한 많은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었고, 사실 내게도 문이 활짝 열려 있었지만, 그놈의 자격지심때문에 선뜻 발걸음이 내딛여지지 않았다. 일 분도 안되는 그 거리임에도 말이다. 도대체 그 자격지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는 마치 한국에서 ‘작가와의 모임’ 혹은 ‘낭독의 밤’과 같은 문학 행사를 하는데 외국인이 ‘나도 한번 한국어 배워보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 나타나는 모양새와 다름 없었다. 내게도 그런 굳은 결심을 하는데 약 8개월이 걸렸다.

‘그냥 들어와서 글쓰기’ 모임에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널찍한 테이블을 둘러싸고 열 댓명의 사람들이 촘촘히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사실 나는 지각도 했다. 속삭이면서 옆사람에게 물었다. “I remember”로 시작하는 글을 써 보란다. 그래서 열심히 썼다. 십 분 정도 흐르니 ‘이제 글을 멈추시고 공유의 시간을 가져봅시다’라고 말한다. 나는 대뜸 손을 들어 버렸다. 그리고 내가 쓴 짧은 글을 읽었다. 의외로 사람들은 내게 질타, 비난이 아닌 ‘오, 미국인의 시각으로 보니 신선하네요.’ ‘이런 문장이 재밌네요.’와 같은 말을 해 줬다. 아아아, 뭔가 내 인생에 봄빛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물론 알고 있다. 그들의 언어, 문학실력에 비해 내 글은 유치해 보일 수 있고,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떠랴. 그들의 시선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곳에서 나와 비슷한 문학, 글쓰기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교류하고, 글쓰기 시간을 가졌다는 그 자체다. 그렇게 하다보면 영어로 쓰기에 대한 나의 애증이 애정이 되고, 달콤한 열매를 맺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민자로서 내가 갖는 영어에 대한 애증은 제2외국어로 영어를 쓰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크고 작게 가질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혹시라도 당신에게 나의 방법이 도움이 될수도 있지 않을까? 서점에 가면 한 바닥씩 주제를 주고 글을 쓸 수 있게 나온 공책 스러운 책들이 있다. 내가 산 책은 “300 More Writing Prompts”이다. 무엇이든지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 그러나 잊지 말자, 시작이 반임을.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