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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봄을 지우는 방식

[워싱턴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7/07/27 06:49

봄을 지우는 방식
허은희

링거에 매달린 금식이라는 글자
몸 안으로 쏟아진다

잘 아는
초대하지 않은 사람의 방문은
쨍한 햇살에 놀라 후다닥 블라인드를 내릴 때처럼
무섭고 겁이 나

안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지
일주일 지나 죽을 삼키다 혀를 깨물었을 때 알았지
떡볶이와 라면, 아는 맛의 유혹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통증이라는 걸

기어이 어둠을 꺼내 불안을 숨기는 밤

돋보기를 들고 누가 내 속을 들여다보나
손전등을 비춰도 들키지 않을 자세로
다락방에 최대한 낮게 구겨져

더 멀리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에 놀라
안경을 벗고
안개를 쓴 채 회진을 받는다

봄은 니힐리즘의 표정으로 꽃을 피우고 지게 한다. 꽃필 때의 봄은 따뜻한 햇볕으로 희망을 익히고, 꽃 질 때의 봄은 하염없는 꽃내음으로 니힐리즘에 젖게 한다. 봄은 꽃을 활짝 피웠다가 지게 하면서 우리에게 인생학습을 시킨다. 나는 타자가 꿈꾸는 욕망을 지향하므로 타자를 만나면서 봄을 맞이하지만, 타자에 의해 지울 허무주의를 배우기도 한다.

인간은 타자를 만나면서 주름과 애증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잘 아는 사람이 무섭고 겁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나를 잘 아는 타자는 호수에 뜬 달을 보듯 나의 겉모습만 본다.

호수에 비친 내가 진정한 내가 아니듯 타자가 나를 보는 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그런데도 나를 잘 아는 타자는 안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모른 채 나에게 고통을 준다. 나와 그가 만든 동상이몽의 봄날을 잔인하게 떠올리게 한다. 왜곡된 시각으로 나를 바라보는 타자라는 꽃이 따뜻한 햇볕에 지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주제는 머리 없는 토르소이다.

임창현/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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