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오명석·윤시내 부부의 시베리아~몽골 횡단 기차여행-③] 눈 없는 시베리아 벌판

눈 없는 시베리아 벌판
상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乖離) 없애기
한정된 음식…선택의 여지 없어 답답

이르쿠츠크 기차 정거장에서 늙은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경위는 이러하다.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새벽같이 일어나서 택시 불러 타고 이르쿠츠크 역에 6시 반에 도착, 기차 시간표 게시판을 아무리 훑어보아도 모스코행 001번은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철도(www.rzd.ru) 웹사이트에서 내가 직접 표를 샀으므로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인데 틀렸으면 어떡하지? 가슴 졸이며 예약 프린트한 것을 살펴보니 분명히 ‘08.06’이 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날짜, 즉 6월 8일이란 소리고 출발시각은 오후 4시다. 러시아는 날짜 적는 방법이 미국과 달라서 여행계획 짜는 내내 날 혼란시키더니 기어코 한 방 맞았구나!

드디어 4시가 되어 모스코행 기차에 올라탄다. 두 사람만 쓰는 1등 칸이다(1인당 약 2만5000 루블). 이 독방에서 3박 4일을 보내야 한다. 사실 기차여행에서는 다른 승객들과 어울려서 얘기도 하고 음식도 나눠 먹고 떠들썩하게 지내야 하는데. 더구나 잔뜩 기대했던 와이파이가 없으니 시간을 무엇으로 메울까?

이르쿠츠크를 정시에 떠난 기차는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질러 기운차게 달린다. 남편과 나는 우리가 상상했던 시베리아와 지금 창밖에 펼쳐지는 시베리아 사이의 괴리에 어리둥절하고 어처구니없고 몹시 실망스럽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콧수염에 고드름을 달은 오마 샤리프가 너덜너덜 떨어진 구두를 신고 비틀거리며 걷던 끝이 없던 눈 덮인 벌판, 우리가 기대했던 시베리아는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춥지 않아서 여행하기 가장 좋다는 6월을 택해 시베리아에 왔으면서 눈 덮인 황량한 시베리아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비논리적인 기대며 터무니없는 욕심이다. 저기 눈이 시리도록 고운 초록의 들판과 한 치의 틈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곧고 하얀 백양나무 둥치와 검푸른 잎으로 하늘과 해를 가린 소나무의 깊은 숲과 마치 동화책 속의 가난한 나무꾼 집처럼 작고 허름한 나무로 지은 집들과 무언가 푸성귀들이 자라고 있는 한 뼘 남짓한 텃밭을 보라. 상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어디에도 있는 것.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지 않는가.

실망스러움을 접고, 지난 5개월간 틈틈이 읽은 시베리아 횡단 기차 여행 안내서 중에서(서병용저, ‘이지 러시아’ 와 ‘Trans-Siberian Handbook by Bryn Thomas’)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을 더듬어 본다.

첫째, 러시아 기차에서는 승무원이 최고 권위자이므로 승무원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조심할 것. 둘째, 어떤 기차역에서는 그 지방 음식과 과일 등을 파는 행상이 있음으로 식사 해결을 위해 그들을 잘 이용할 것. 셋째, 돈은 전대에 넣어 배에 차고, 사람 많은 데서는 백팩을 앞으로 멜 것. 넷째, 함부로 미소 짓지 말 것.(러시아 사람들은 이유 없이 미소 짓는 사람들을 의심한다) 다섯째, 식당에 갈 때는 잘 차려입고 갈 것. 여섯째, 식사 후 팁. 팁은 어떻게 하라고 했지? 이 점 알쏭달쏭하다.

첫째, 기차 승무원. 우리 일등차의 승무원은 키가 약 150㎝, 몸무게는 약 65kg(?), 무릎이 아픈지 하얀 붕대를 한쪽 다리에만 감고 있어서 레슬링 선수를 연상시키는 다부진 체격의 중년여자이다. 승객이라곤 우리와 옆방 내외뿐인데 저 승무원의 직책은 뭘까. 우리가 추측하기는 우선 사모봐르(Samovar)의 불을 계속 지펴서 설설 끓는 물을 항상 준비할 것, 기차가 정차하기 전에 화장실을 조사해서 안에 사람이 있으면 빨리 나오라고 할 것.(왜냐하면 기차가 정차하면 화장실 문이 잠기므로 까딱 잘못했다가는 화장실에 갇힌다) 기차 복도의 커튼을 닫을 것. 바깥 풍경을 보는 것이 기차 여행의 중요한 이유이므로 나는 한사코 복도의 커튼을 열어놓는데, 내가 잠시 한눈 판 사이 커튼은 영락없이 닫혀있다.

둘째, 정거장에서 먹을 것 사기. 큰 역에서는 행상들이 딸기, 앵두, 닭 다리, 소시지, 구운 생선 등을 파는데 우리는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앵두 한 봉지 사고, 상점 유리창에 붙어있는 한국 라면 봉지를 보고 눈이 번쩍 뜨인다. 따끈하고 얼큰한 라면을 훅훅 불어가며 먹고 나면 속은 확 풀리고 배는 두둑하고 잠시나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데! 나는 신라면 두 개를 (하나에 175루불, 3불이 넘지만 지금 값 따질 때가 아니다) 들고 기차로 오면서, 끓는 물이 항상 있음을 고마워한다. 그리고 얼마 후 뱃속이 출출해지자 지금 먹으면 딱 좋겠다 싶어 물을 가지러 일어나다 말고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세상에 바보도 이런 바보가 있나. 컵라면을 사야지 맨 라면을 샀으니 끓는 물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셋째, 돈 간수하기. 우린 전대도 없으려니와 돈도 몇 푼 안 되어서 그냥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사람 많은 곳에서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안내원이 자꾸 주의를 주면 마지못해 백팩을 앞으로 메었다가 금방 제자리로 돌리곤 했는데 아무 사고도 없었다.

넷째, 함부로 미소 짓지 말 것. 이 점 참 지키기 어려웠다. 특히 기차 승무원에게는. 승무원 눈 밖에 나서는 안 된다는 주의사항을 기억하고 있어서 물을 가지러 갈 때, 화장실에서 나올 때, 정차한 기차에서 내렸다가 다시 탈 때, 승무원과 마주치면 저절로 웃는 얼굴이 되었고, 승무원의 무뚝뚝한 눈초리를 받으면 아차!
하고 놀라기 일쑤였다.

다섯째, 식당에 갈 때는 잘 차려입고 갈 것? 천만의 말씀. 잘 차려입고 가는 식당에 가보지 못해서인지 우리가 점심, 저녁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는 잘 차려입으면 오히려 어색할 지경이었다.

여섯째, 팁. 팁은 잘 몰라서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했다. 1980년 후반 소련을 여행한 분이 여행 도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게 무슨 대수랴 싶어서 괜히 부자 티를 내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번 여행에서 그게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구겨진 옷이나마 깨끗한 거로 갈아입고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였다. 식탁은 좌우로 열 대여섯 개 되는데 손님은 하나도 없다. 웨이츄리스가 가져온 메뉴를 보니 점심으로 Option A 와 Option B가 있다. 서로 비슷비슷한 음식이기에 하나씩 달라고 했더니, Option B는 없다고 한다. 이상하다. 손님이나 많으면 모르지만 아마도 우리가 첫 손님인듯한데 Option B가 없다는 게 무슨 소린가.

같은 날 저녁, 다시 식당차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역시 손님은 우리뿐이다. 맛도 별로 없고 값만 비싼 식당차를 러시아 사람들은 이용하지 않는 듯하다. 저녁 메뉴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보-쉬 수프와 굴라시가 있어서 얼씨구나 하고 주문했더니, 보-쉬 대신 닭고기 수프, 굴라시 대신 소고기 스튜만 있으니 그걸 먹으라고 한다. 아이스크림만 해도 맛이 수십 개나 되는 미국에서 40년이 넘게 살고 나니 선택하라고 엄연히 써놓고서도 선택을 허용하지 않는 환경이 답답하고 허위스럽고 얕잡아 보고 싶다. 이래선 안 되는데. 내일이면 모스코에 도착할 테니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문의: seenaeyoon@gmail.com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