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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성장하는 한인사히…정치·경제력 '쑥쑥' 교육 '최대 화두'

인구·교육·정치·경제 부문

워싱턴 인구 10년새 3만6000명 ‘쑥’
미 전역서 3번째로 많아…VA 센터빌·MD 엘리컷시티 급증




워싱턴 일원에 한인들은 얼마나 살고 있고 워싱턴 중앙일보가 거쳐온 지난 10년간 얼마나 늘었을까.

매 10년마다 인구전수 조사를 실시하는 연방 센서스국의 2010년 인구현황 통계에 따르면 워싱턴 일원의 한인은 총 12만 1441명으로 나타났다. 버지니아는 7만557명, 메릴랜드 4만8594명, 워싱턴DC 2290이다.



이는 2000년 워싱턴 총 인구 8만5529명 보다 3만5912명이 증가한 것이다. 지역별로는 버지니아의 경우 10년 만에 55.9%(2만5298명), 메릴랜드는 24.1%(9437명)이 늘었다.
이 같은 워싱턴 지역의 한인 인구는 미국내 LA, 뉴욕 및 뉴저지 권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시카고 인구가 워싱턴보다 많았다.

워싱턴 일원 한인 인구의 30% 가량은 버지니아 페어팩스 카운티에 집중돼 있다. 페어팩스의 한인인구는 4만1356명으로 버지니아 전체 한인 인구 10명 중 6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메릴랜드에서는 몽고메리 카운티(1만7436명)와 하워드 카운티(1만2333명)에 한인들이 몰려있다. 전체 24개 카운티 중 이들 2개 지역 거주 한인들이 메릴랜드 한인 인구의 61%를 차지했다.

10년 만에 가장 눈에 띄게 한인 인구가 집중된 도시는 버지니아 센터빌(7415명)과 메릴랜드 엘리컷시티(5333명)이다. 이들 지역의 한인 인구는 전체 지역 주민 10명 중 1명꼴로 집중도가 높다.

워싱턴DC도 2010년 2990명으로 10년 전(1095명) 보다 무려 1195명이 늘어, 단순 증가율로는 109.13%로 미국내 어느 지역보다 증가폭이 컸다.

장대명 기자

성공신화 위해…사교육 '급신장'
대입전문 입시학원·전국 프랜차이즈 학원등 설립
가족 태평양 두고 생이별 ‘기러기 가족’도 양산




지난 10년간 워싱턴 한인 사회의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교육 시장도 크게 확대됐다. 한인들은 이민 이유에 대해 경제적인 것과 자녀 교육을 가장 으뜸으로 꼽았기 때문에 이민 사회의 성장은 동시에 교육 영역의 확대를 가져왔다.

사교육을 통해서라도 자녀들의 학교 성적을 올리고 원하는 좋은 대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부모들은 많은 재정적·시간적 투자를 했다. 단적인 예로 워싱턴 지역의 입시 학원(대학입시 프랜차이즈 학원, 초·중등용 학원 포함) 수는 2011년 120여개(중앙일보 업소록 기준)로 지난 2001년 60여개의 거의 두 배나 증가했다. 자녀가 아주 어리지 않고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 즉 10세 안팎 이후에 이민온 가족들은 자녀들이 더 빨리 또 성공적으로 중·고교 과정을 마치게 하기 위해 사설 학원을 백분 이용하기도 했다.

미국이 부동산 경기 등의 붐을 타면서 경기 호황이 한창이던 지난 2000년대 중후반까지 자녀들의 교육을 이유로 한 가족 이민또는 기러기 가족 형태의 워싱턴 이민은 꾸준하게 증가했다. 2008년 이후 세계 금융 위기와 함꼐 원·달러 환율이 치솟고 한국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일반 유학은 물론이고 기러기 가족 형태의 극단적 선택은 주춤한 상황이다.

부모 한쪽이 한국에 남아 경제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 생이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기러기 가족 이민(및 유학)은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주류 언론에서도 대서특필 되는 등 자녀 교육과 새로운 사회에 도전하는 한인들의 모습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같은 사설 학원 시장의 확대는 단순히 영어, 수학 등 핵심 과목 학원이나 입시 학원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방과 후 활동을 책임지는 예·체능 영역과 한글학교까지로 확대됐다.

70,80년대 이민 자녀들이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영어와 미국 문화를 익혀 미국 사회로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90년대 이후 이민 가정 자녀들은 모국어인 한국어 학습도 함께 중시된 것으로 분석된다. 이같은 분위기 변화는 기업이나 정부의 인재 채용 정책에서 이중 또는 삼중 언어 특기자에 대한 특혜 등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이민 자녀들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꾸준하게 성장해 온 한인 사회는 한국 학교 규모도 확대시켜 이민 자녀들이 자연스럽게 모국어를 익힐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마련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송훈정 기자

한인사회, 미 정치무대 주인공 발돋움
 마크 김 VA 주하원의원·그레이스 한 헌든 시의원 등 배출

 
 
 언제부터인가 ‘한인 정치력 신장’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이민 1세대들이 미국에 정착해 한숨 돌릴 만 하니 정치쪽으로 관심이 옮겨간 것이다. ‘우리도 이제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나 주류사회에서 큰 목소리를 내보자’. 그렇게 정치력 신장은 곧 한인사회의 영향력을 키운다는 말과도 통했다. 한인단체나 기관들이 유권자 등록 운동을 벌이고, 정치인들의 후원회에 참가하거나 직접 후원 행사를 열기도 했다. 그래도 한인들의 정치 참여는 걸음마 단계였고, 선거에선 들러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지난 10년동안 워싱턴 정치계의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우리들의 선거’를 만들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인들이 지역 정부, 주 의회 등 선거에 출마하면서 무대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이다. 버지니아주에서는 최초의 한인 하원의원(마크 김·민주)이 탄생했다. 1.5세인 김 의원은 2009년 첫 출마 당시부터 당선 직후, 또 다시 올해 재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늘 ‘나는 한인’이란 점을 강조했다. 미국인들이 뒤섞인 장소에서도 그런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스스로 한인 이민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를 한인사회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올해 11월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단독 입후보로 재선에 성공했다.

 지난해 5월엔 역시 버지니아주에서 한인 여성이 최초로 선출직 시의원에 당선됐다. 헌든 시의원직에 오른 한인 2세 그레이스 한 울프씨다. 10여년 전 헌든에 정착한 한씨는 헌든 예술위원회 회장직을 비롯 다양한 봉사활동에 참가하며 지역사회에서 입지를 다져왔다. 전국 최고 수준으로 손꼽히는 페어팩스카운티에서 광역 교육위원을 맡고 있는 문일룡 변호사도 빼놓을 수 없다. 4선에 도전하는 문위원은 총 3자리의 광역위원직을 놓고 오는 11월 선거에서 7명의 후보와 경합을 벌일 예정이다.

그런가하면 메릴랜드에선 지난 2006년 한인 2세 마크 장(공화)이 주 하원 선거에 출마하며 주류사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비록 당선되진 못했지만 장씨는 주하원 예비선거에서 현직 의원을 포함한 4명의 경쟁자를 누르며 당당히 1위를 차지, 주목을 받기도 했다.

지난 10년간 양적, 질적으로 성장한 한인사회가 앞으로 더욱 많은 한인 정치 주역들을 배출할 것으로 기대해본다.

 유승림 기자 ysl1120@koreadaily.com


한인사회 경제권
한인업체 10년만에 두배 성장
애난데일 중심 상권 형성…부동산업계 주춤
대한항공 주 3회 경유노선서 주7회 직항 개설




10년이면 강산이 변했다는 것을 애난데일 한인사회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10년전 워싱턴 DC 인근 한인사회는 애난데일을 중심으로 가끔 한인 상가들이 이제 막 한글 간판을 걸어도 크게 튀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애난데일에서 간판을 내걸고 영업하던 한인업소는 당시에 대략 700여개 업소로 추정됐었다. 물론 워싱턴 일대 전반에서는 약 1500개 정도로 추정됐지만 애난데일 분위기는 이제 막 본격적인 한인상권을 형성하던 시기이다.

2001년 9.11 직후 시기에 IT거품이 시작돼 일시적인 경기후퇴를 겪으면서 당시부터 한인들 사이에서는 “부동산이 한국에서 처럼 불패신화가 될 것”이라며 한국에서 막 온 이들이 집을 사기 시작했다. 향후 약 6년동안 다가올 부동산 붐을 맞이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당시 3배드룸 타운홈 한 채 가격은 1200스퀘어 피트 규모가 약 12-13만달러 선을 하던 당시였다. 모기지 상환금은 한달에 약 800달러에서 900달러 대에서 해결되던 시기였다.

특히 한인 거주권은 당시만 해도 센터빌 지역에서는 센터빌 초등학교 한반에 한인 학생이 1명 있으면 아시안이라고 눈여겨 보이는 대상이 될 정도였다.

게인스빌이나 해이마켓 등에는 한인들이 거주한다는 생각 조차 하지 못하던 시기이다.

한인상권의 규모는 모 언론사 추정으로 한달 광고시장 규모가 150만달러로 보면 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1달러 50센트 대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한인들의 페어팩스 붐은 아직 지금처럼 높지 않아 한국에서 오는 대한항공 비행기는 1주일에 화, 목, 토 주 3회를 왕복했었다.

당시 환율은 1달러에 1300원-1400원 정도선. 한국이 1997년 국가환란을 당해 한 때 2000달러 가까이 갔던 후유증으로 다소 높았었다.

인구센서스에 응해 집계된 당시 한인들의 수는 3만명 선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불법체류자나 지상사, 이민신청자들을 합칠 경우 메트로 일대 한인들을 약 20만명 정도로 비공식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그러던 한인사회는 현재 언론사 광고시장에서 한달에 350만달러선까지 치솟았으며, 현재 경기침체로 약 250만달러 선으로 추산하고 있으나 잠재력은 여전하다.

현재의 한인간판을 단 업소수는 약 3500여곳으로 추정된다. 10년전보다 약 2배 늘어난 수이다.

가장 큰 특징은 이전에는 한국산 음식을 먹기가 불편할 정도의 수준이었던 상권이 활발해져 한국 음식은 맛과 솜씨가 한국 수준으로 올라섰다는 평이며, 간단한 한국산 물품을 보따리로 옮겨와 매매하던 상황에서 현재는 “없는 게 없다”고 할 정도로 세분화되고 전문화돼 한국과의 거리차이가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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