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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은 안 여사의 눈물을 먹고 자랐다

여자 전사들: 도산 안창호의 부인 안헬렌(상)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위기를 맞은 한국에서 국경과 인종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지도자가 탄생했다. 도산 안창호에게 애국자 또는 독립운동가라는 호칭들은 그를 설명하기에 너무나 부족한 수식어이다.

안창호는 분열된 한인사회를 통합하는 기적을 이루어낸 지도자였으며, 한국의 독립과 민주화 그리고 해외로 떠난 한국인들을 위해 평생을 싸우다 간 선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산 안창호는 유교시대에 태어나 자랐으면서도 혁명가, 노조 조직책, 그리고 사회 통합가로서 활동했을 뿐 아니라, 미국식 민주주의 그리고 평등주의를 꿈꾸며 몸소 실천에 옮긴 지도자로 평가할 수 있다.

1938년 일제에 항거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도산 안창호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이 첨예하던 시기에 이미 통일 한국의 꿈을 꾸고 있었다는 사실은 70년이 흐른 지금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도산은 평양에서 스승의 딸 안헬렌(이혜련)과 결혼 후 망명 생활 동안 다섯 자녀를 뒀다. 나는 도산에 대한 책도 읽고 명성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김그레이스가 나에게 선구자인 도산에 대한 심층 취재를 권유했는데 일단 미 전역에 퍼져 생존해있는 도산의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을 먼저 찾아가 만나보기로 했다.

안헬렌의 생애

안창호의 자녀들과 손자, 손녀의 증언을 통해 안헬렌 여사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여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세상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은 그녀의 생애는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한 남편 안창호를 내조하고 돌보는 데 바쳐졌던 것으로 보인다. 도산 안창호는 미국에서 출생한 아이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조국, 한국과 결혼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도산이 조국 독립을 위해 하와이, 중국, 러시아, 유럽, 그리고 멕시코 등 해외로 다닐 때 안헬렌 여사는 농장 노동, 가사 노동, 청과상, 봉제공 등의 막노동을 하면서 남겨진 가족들과 남편을 돌봤다. 안 여사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기에, 도산 안창호의 정신적 동반자이자 후원자로서 도산 못지 않게 큰 역할을 해냈다. 그녀는 또한 리버사이드와 로스앤젤레스 자신의 집에서 가난한 한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그들을 돌봤다.

안 여사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난 1980년 당시, 72세의 백발 노인이 된 장녀 수전 안을 통해 어머니인 안 여사의 생애를 조명해볼 수 있었다. 안수전 여사는 1942년 미 해군에 입대한 최초의 한인, 그리고 아시안 여성으로서 이민사를 장식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후 그녀는 미 해군 역사상 최초의 여성 포병장교로 임관했으며,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과의 전쟁에서 정보장교로 활약하기도 했다.

도산 안창호의 막내 아들 랠프도 함께 인터뷰에 참여해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눴다. 랠프는 교사에서 은퇴한 후 누나 수전, 수라와 함께 문게이트 식당을 운영했다. 문게이트 식당은 로스앤젤레스 근교에서 장남 필립이 운영하던 곳으로 필립은 그 지역의 명예시장 역할을 오랫동안 맡았으며 최초의 아시안 아메리칸 영화배우로서 명성을 날렸다. 안필립은 1974년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

다음은 수전과 랠프가 돌이켜본 엄마 안헬렌 여사에 대한 기억이다

▶수전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성이었다. 어머니의 희생 없이 결코 아버지는 조국 독립을 위해 세계 곳곳을 다니며 활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조용히 뒤에서 도와주고 후견인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한 번도 불평하신 적이 없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봤다. 어머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강한 여성이었다.

▶랠프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직전 1926년 집을 떠났는데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41세였다. 내가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아버지에 대해 물어본 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활동에 대해 내게 설명해 주곤 했다. 아버지는 단 한 푼도 집으로 송금하지 않았다. 자신도 가난했기 때문에 송금할 돈이 없었다. 우리는 다 함께 절약하며 가난을 이겨내야 했다. 어 머니는 가정부로 일하면서도 아버지에게 돈을 부치곤 했다. 어떻게 어머니가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저자

-이경원: 주류언론에서 지난 40년 동안 기자활동을 했으며 미주 한인사회의 영문신문인 ‘코리아타운 위클리’와 ‘코리아 타임’지 발행인과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97년 버지니아에 위치한 언론인 명예의 전당에 유일한 아시안 저널리스트로 헌액됐다. 미주 한인언론인협회 창립을 주도했으며 UCLA에서 언론학을 강의했다.

-고 김익창: UC데이비스 의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은퇴했다. 미주한인정신과의사협회를 창설했으며 아시안 아메리칸 정신과의사협회의 기관지 편집장을 역임했다.

-김그레이스: 한국과 미국에서 38년간 교직생활을 하고 은퇴했다. 서울 교육대학을 졸업했으며 캘폴리 샌루이스 오비스포에서 카운슬링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옮긴이

UC리버사이드 대학교 교수이며 대학 부설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소장이다. UC버클리에서 한흑갈등 연구(New Urban Crisis: Korean-Black Conflict in Los Angeles)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 ‘미국의 흑인 그들은 누구인가’,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 ‘아시안 아메리칸’ 등이 있으며 LA폭동 전문가로 미국과 한국 주요 대학에서 초청 강연을 했다. SAT한국어 채택에 기여한 공로로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민정음 반포 549돌을 맞이하여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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