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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빨간 맨발의 산비둘기

가을이면 산과 들에 산수유, 찔레며 온갖 열매가 익고, 풀 씨가 여물어 새들의 먹이가 되지만, 겨울이 오고 2월이 되어서는 굶주리게 된다. 나는 첫눈이 내릴 즈음이면 산새 모이를 가득 준비한다. 부엌 앞의 발코니에는 먹이를 찾는 아름다운 새들이 날아오기 시작해 눈 덮이고 나무 이파리가 다 떨어진 삭막한 겨울 풍경의 쓸쓸함을 기쁘게 만드는 일…. 이제 블루제이, 붉은 카디날, 참새…이름 모를 새들이 나의 창가에서 지저귀니 정겹고 따스하다. 한번도 볼 수 없던 산 깊숙이 사는 새들도 날아온다.

창 가까이 가거나 문을 열면 새들은 숲 속으로 날아가는데 산비둘기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생김새도 깃털 빛깔도 수수하고 빨간 맨발의 산새, 이름은 'Mourning Dove.'한글 사전에는 '애도 비둘기'라고 적혀있다. 어느새 나는 산비둘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나의 겨울은 그렇게 지났다.

나의 시(詩), '폐경기' 시리즈를 읽고, 만나고 싶어 찾아온 그 분을 반겨, 작년에 말려놓은 박하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폐경기를 힘들게 지내는 듯 보였다. 다시 만날 약속도 없이 떠나고 남겨놓은 선물 상자를 여니, 조화 장미 바구니가 들어 있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바구니에 큼직한 분홍 장미 조화 몇 송이가 탐스럽게 담겨 있었다. 나는 은근히 '이 산 속의 어느 장소에도 이 조화 바구니는 어울리지 않아' 하며 둘 곳을 찾았지만 마땅치가 않았다.

쑥을 잘라 거꾸로 매달아 놓은 처마 밑 그늘진 곳에는 통풍이 잘 된다. 마늘도 줄기를 땋아 걸어놓고 시래기 말리기에도 좋은 장소이다. 처마 밑에는 나무 선반이 있는데 그 선반 위에 조화 바구니를 올려놓고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거름이 좋아 쑥은 대를 올리며 쑥쑥 자라고, 그 향기로움이 늦봄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쑥을 가득 잘라 새끼줄로 묶어 놓은 처마 밑으로 갔다. 조화바구니가 눈에 거슬렸다. '오늘은 버려야겠어, 미안해도 할 수 없지…'하고 혼잣말을 하며 바구니를 드는데 묵직하다.



나는 놀라 뒷걸음질 치니, 나보다 더 놀란 새 한 마리가 뛰쳐나와 선반 위에 앉아 나를 내려다본다. 조심스레 바구니를 꺼내보니, 어느새 지푸라기로 둥우리를 만들고 하얗고 조그만 알 두 개를 낳아 품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제자리에 바구니를 올려놓고 두 손으로 조심스레 어미 산비둘기를 들어 올려 계속 알을 품도록 해 주었다.

봄에 새들이 새 둥지를 만드는 것, 마른 지푸라기들로 입으로 물어오고 젖은 땅에서 진흙을 옮겨와 서로 엉키게 하기를 며칠…. 또한 새들은 숲에 사는 부엉이 같은 위험한 동물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안전한 곳을 찾아 다니는데, 처마 밑이니 비도 들이치기 않고 새끼도 먹히지 않을 곳으로 조화 바구니가 제격이던 것이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떤 경우라도 무엇을 업신여기거나 으쓱대는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왔는데, 은근히 조화를 가져온 사람의 성의를 하찮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들켜버리고 만 것이다. 나에게는 쓸모 없는 것이더라도, 그 것이 어느 곳에서는 신비한 일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러워한다. 새의 둥지에서 아기 새가 태어나는 그 신비로움! 그 비밀스러움!

세상사는 일은 참으로 애처롭도록 아름다움이 있다. 산에서 상쾌한 바람이 불어온다….


허금행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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