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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완섭 칼럼]산다는 것@미국 '원치 않는 남

자 품에 안겨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 하는 여자의 마음'

한 1.5세 후배는 미국에 사는 심정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이'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조국 한국을 '원치 않는 남자'는 현재 살고 있는 미국이다. 참 기막힌 표현이라며 무릎을 쳤었다. 갈등과 스트레스의 연장선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이민생활의 애환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싶었다.

부모의 선택에 의해 할 수 없이 자신의 운명이 돼 버린 이민생활. 서로 다른 피부색과 가치관을 가진 친구들 속에서 살아 남는 법을 터득해 나가야 했던 미국에서의 삶에 대한 회한을 그는 그렇게 정리해두고 있었다. 그 속에는 부모에 의해 삶의 터전이 바뀌어 버린 운명에 대한 항변이 칼날처럼 도사리고 있다.

그는 부모와 갈등을 겪을 때마다 "왜 나를 미국에 데려 왔냐?" 며 따졌다고 한다. 어차피 인간은 자기의지가 아닌 우연에 의해 세상에 던져진 존재들이지만 이민은 선택하는 행위이고 그게 자신의 선택은 아니었다는 것 때문에 그는 부모에 항거할 때 무기 삼아 들이밀었고 그때마다 부모는 맥없이 말꼬리를 흐리곤 했다는 것이다.



어찌하다 나도 그런 질문에 봉착한 적이 있다. 40년 가까이 살던 나라를 떠나 보따리 싸 들고 이민 온 첫해. 허드슨 강가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던 도중 느닷없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큰 녀석이 엉엉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자동차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제딴엔 억눌렀던 타향살이 설움이 복받쳤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말했다.

"저 그냥 울게 좀 놔주세요. 엄마 아빠는 어떨지 모르지만 저는 힘들어요. 이해해 주세요. "

예기치 못한 녀석의 반응에 당황했다. 적응이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철부지 어린아이가 그런 속앓이를 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었다.

녀석이 바로 그때 이런 질문을 날렸다. "아빠 이민 올 때 저한테 물어 보지 않았잖아요?"

가슴을 쳤던 그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그 녀석이 또 한번 우리를 울린 적이 있다. 어느 날 곤히 잠든 녀석의 손을 펴 보았는데 손바닥에 굳은 살이 배어 있었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고 아는 친구도 없는 외톨이 신세여서 쉬는 시간에 운동장 한쪽 철봉에 매달려 혼자 놀다보니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그 때 알았다. 아하- 나 때문에 낯선 땅에 내던져진 아이들이 철봉에 매달려 외로움과 고통을 몰래 삭이고 있었구나.

수십년 살던 둥지를 떠나 이민 길에 오르면서 인생의 말을 갈아타야 했던 1세들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 겪었음직한 서글픈 '아메리카 아리랑' 이다.

1세들에게 이민이 적극적인 의미의 선택이었다면 2세들에겐 '주어진' 숙명이다. 스스로 선택하는 행위와 타인에 의해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적극적인 선택이었기에 1세들은 어떤 불편함이나 고통도 감내할 준비가 돼 있을테지만 원치 않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1.5세 2세들의 정신적 방황은 더 클 수도 있다. 정신질환자가 1세보다 2세들에게 더 많다는 사실도 다분히 그런데서 연유한다.

2세들의 밑바탕에는 여차하면 '이건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말할 '이유'와 '항변'이 늘 준비돼 있다. 특히 1.5세들은 1세와 2세에 낀 샌드위치적 운명 때문에 양자의 장점을 두루 섭렵하면서 뿌리를 내릴 수도 있지만 어영구영하다간 귤이 탱자로 전락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전대미문의 총격사건의 범인 조승희는 우리의 아들이다. 그를 어두운 동굴로 몰아넣은 것도 그가 외로움과 질곡 속에서 신음하다 세상을 향해 저주의 총구를 겨누게 만든 것도 우리들이다.

다민족 사회가 반드시 오케스트라 처럼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것은 아니다. 치이고 짓밟혀도 비명조차 질러보지 못하고 불협화음을 내며 사는 인생들이 훨씬 더 많다. 소외와 차별이 수반될 수 밖에 없는 다민족.이민사회에 제2 제3의 조승희는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시간도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공부' '출세''명문대''돈'따위를 요구하며 그들을 벼랑끝으로 밀어 넣고 있는 지도 모른다. 부조리한 사회 벤츠와 꼬냑에서 멈추지 않는 우리들의 끝없는 욕망이 조승희에게 좌절과 저주를 불러 일으키지 않았는가.

그에게 살인범이라 손가락질 하기전에 우리가 먼저 그 아이가 일찍부터 보여준 이상징후를 들여다 보았어야 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어야 했다.

비록 '원치 않는 남자'품에 안기도록 손을 이끌고 이 땅에 건너왔어도 내 아이가 절망속에 몸부림을 치고 있었는 지 아니면 희망을 꿈꾸고 있었는 지 한번쯤 돌아봤더라면 파국은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아이들이 행여 봄날 버러지 같은 새싹이라도 키우고 있었다면 장차 이 땅은 그들에게 '원치 않는 남자의 품'이 아니라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는 희망의 나라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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