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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파워] 연아 마틴

보수당 연방의원 후보

연아 마틴(Yonah Martin)은 2007년 3월 트라이시티 지역, 보수당 연방의원 후보로 공천을 받으면서 한인사회 최초로 정치에 첫 발을 내딛은 여성 지도자다.


그동안 만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교사로서, 교회와 지역사회를 위해 폭넓은 봉사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차세대봉사단체인 C3(Corean Canadian Coactive)를 창립, 세대와 민족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음으로써 한인사회는 물론 캐나다 사회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공인이 된다는 것은, 동시에 무거운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다.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관심과 비판의 대상이 된다.
더구나 그녀는 처음부터 여성이라는 점과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더블 마이너리티(double minority)를 안고 출발한다.
무엇이 이 험난한 길을 선택하게 했는지 인간, 연아 마틴을 조명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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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퀴틀람에 위치한 밴팅 중학교(Banting Middle School)에서 연아 마틴을 만났다.
아보츠포드와 코퀴틀람 교육구에만 있는 학제로서, 여기서 그녀는 Gr. 6-8 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Language Arts)와 프랑스 어, 그리고 휴머니티(Humanities)를 가르친다.
이미 20여 년 가까이 해온 일이다.
그녀의 본업은 교사인 것이다.


- 최근 정치 입문을 선언하셨는데, 그 배경을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민 1세대인 우리 부모님들은 생존(fear based survival)이 문제였습니다.
처음 접하는 서양 문화에 당황하고 두려움을 느끼면서, 어떻게든 가족을 보호하고 살아남아야 했어요. 당신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우리 2세들은 나름대로 그러한 전통적인 가치에서 오는 여러 가지 사항(cultural expectation, limitation, a kind of pressure)을 극복하면서 성장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캐나다를 기준으로 보면, 여성 인구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데 비해 여성 정치인은 20%에 그치고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권리가 상당히 균형을 이루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30%나 되는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본래 여성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여성이고, 또 어머니입니다.
내 딸 세대를 위해 좋은 역할 모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 어머니와 연아 자신, 그리고 딸에 이르는 3세대의 여성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모든 여성은 매우 자연스러운 모성 본능(natural motherly protective instinct)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아버지가 ‘캐나다에 온 후 너희 엄마 많이 변했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제가 볼 때, 어머니는 점점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고 그녀 자신이 되어가는 것(She is becoming herself.)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못한 거 너는 다 해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폭적으로 제가 원하는 모든 걸 후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걱정이 많기 때문이죠. 저 역시 그렇더군요.

나만큼은 절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딸 아이를 키우면서 언제나 내 안에 있는 보호본능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를 못하게 한다든가 옷 입는 취향에 대해서도 간섭을 했지요. 그러나 MSN 같은 것은 그 세대들만의 사회적 네트워크이고, 패션에 대한 취향도 여러 가지를 시도하면서 그들 스스로 점차 감각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무책임하게 내버려두라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것이 뭔지, 꿈이 뭔지 찾아가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특히 틴에이저를 둔 엄마들은 솔직히 여러 모로 가치에 대한 도전을 겪게 되는데, 특히 ‘일하는 엄마’는 몇 배 더 힘들지요. 반면 딸, 미선을 보면 정말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세대(true free thinker)입니다.



- 직장과 정치, 가족을 돌봐야 하는 여성으로서 가족 누군가의 전폭적인 지지와 헌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누가 그 역할을 담당하나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의 부모님이 가장 큰 협력자입니다.
아이가 한 살 조금 지나서였나? 정말 간절히 도움이 필요할 때, 부모님이 직장에서 은퇴하셨습니다.
당시 우리는 버나비에, 제 직장은 아포츠포드에, 부모님은 밴쿠버에 살고 계셨지요. 그러다가 아예 부모님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습니다.


- 한국의 요즘 젊은 세대들도 부모와 같이 살려고 하지 않는데, 벌써 10년이 넘는 세월이 아닙니까? 남편이 캐네디언인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나요?

“잘 이해 못하는 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웃음). 더글라스는 아무래도 제3자적 거리(third party distance)가 있어서, 오히려 복잡한 가족사에 스트레스를 덜 받습니다.
그리고 저는 좀 감정적인 데 비해, 그는 매우 안정적인 성격입니다.



-남편, 더글라스 마틴에 대해 좀더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랭리에 있는 대안학교(Alternative School)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는 마약이나 알코올, 가족 문제 등으로 기존 학교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설립된 학교(BC주에서 운영하는 pilot program중 하나)입니다.
Gr.8-12학년까지 다 갖추어져 있으므로, 졸업하면 컬리지나 테크니컬 스쿨로 진학하거나 트랜지션 프로그램을 통해 정규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어요.

결혼할 때 부모 역할에 대해서 토론을 했었어요. 왜냐하면 그와 저의 성장과정이 다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시부모님들은 두 분 다 교사 출신인데, 굉장히 개방적이고 철학적인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Did you learn something?’ 한 마디 묻고, 거기에 ‘yes’라고만 대답하면 모든 일이 통과였다는군요. 그래서인지 제게나 딸에게나 전통적인 남편이나 아버지로서 잔소리를 하거나 참견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성장 배경에 대해 오히려 한국인들처럼 좀더 일찍이 아카데믹한 분야에 대해서 부모가 설명하고 자극을 주었더라면 빨리 철들었을(?) 거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 그렇지만 정치를 한다는 건 일반적인 사회봉사활동의 범위를 넘어서는데, 어떻게 가족적 동의를 얻어내었습니까?

“ 공식적인 정치 활동은 2007년 3월 보수당 연방후보로 공천되면서 시작되었지만, 이미 후보자 명단에 올랐을 때부터 캠페인 등을 계속 해왔습니다.
당시 딸까지 포함하여 가족회의를 열었었죠.

앞으로 우리의 사적인 생활까지도 공개될 수 있다 등등 여러 문제를 상의했습니다.
제게는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 부르신다’는 소명의식이 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단지 한 살 두 살 나이를 더 먹어가는 게 아니라 점점 내 자신이 되어 간다고 말했지요. 이 점에 대해 가족들이 공감해주었습니다.



- ‘나 자신이 되어간다’는 건 자신의 가치, 아이덴티티를 찾아간다는 뜻입니까?

“캐나다 사람으로서 한국인으로서 저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딸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을 재발견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처음 결혼할 때 저희 부모님이 꽤 반대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죠. 서양 문화란 오로지 TV를 통해서 드라마(soap opera)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었고,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일하면서 고충이 많았을 테니까요.

게다가 아버지는 교회 장로이고 제가 맏딸이기 때문에 동생들한테 어떤 영향을 주겠나 걱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한인사회는 정말 작고 닫힌 사회여서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SFU의 윤진미 교수는 이러한 당시 한인사회를 ‘Group of 67’(1967년은 캐나다 정부에서 아시아 이민자를 최초로 받아들인 해다.
)이라는 사진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했지요.
저는 딸아이를 보면서 그애는 나와 같은 위기나 고민(crisis)을 겪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도 마틴이고 피부도 하얗고 영어도 잘하니까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4살 때부터 ‘엄마 눈과 내 눈은 왜 다르지? ’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밴쿠버 이스트 지역의 또래 학생 중 거의 85%가 동양계였습니다.


특히 한글학교를 가거나 교회 주일학교를 가거나 집안 행사에서는 거의 한국사람만 만나고, 아트 엄브렐러 같은 미술 아카데미를 가면 모두 백인들만 마주치니까, 아주 어려서부터 자기 정체성에 의문을 가졌던 것(identity search)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김미선, 캐나다 사회에서는 키아나 마틴이라 불리니까, 한때 아예 자신의 이름을 ‘키아나 김 마틴’으로 바꿔 달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지금 이런 문제는 어느 정도 극복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밴쿠버국제 어린이 페스티벌 기간 동안 한국 텐트에서 봉사활동을 했는데, 직접 도자기도 만들고 컵라면도 함께 먹으면서, 캐나다 사회에 한국문화를 알리는 데 아주 신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렇지만 엄마인 저로서는 이렇게 생김새 자체가 동서양이 반반씩 섞인 딸의 고민을 모두 이해할 수 없으니 안타깝지요. 이렇게 눈에 보이는 마이너리티(visible minority)를 가지고 있는 그애를 보면서, 더욱 정치에 나설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와 지역 사회를 위해 폭넓은 봉사활동을 해오셨습니다.
언제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15세 때부터 교회 주일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종교, 예배, 한인 사회, 가족 등 모든 의미에서 중심이었습니다.
저는 특별히 신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1996년부터는 영어 설교까지 맡으면서 목회 활동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그만두겠다고 여러 번 생각했지만, 그때마다 평생 교회를 위해 한인사회를 위해 봉사해온 기둥과 같은 1세대 어른들을 보면서, 도저히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못했습니다.
맘 먹고 갔다가 결국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보고만 드리고 앞으로 더 잘하겠습니다’ 하고 돌아서는 형편이었지요.

한편 딸아이가 한글학교를 다니면서 여러 가지 일을 돕게 되었는데, 한글학교 개교 30주년 기념행사를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서병길 이사장님이 1회 졸업생인 저와 앵커 이미정씨에게 기회를 주신 거지요.

이 일을 통해 우리 2세들이 좀더 조직적으로 봉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C3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캐나다 사회는 한인사회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들의 요청에 따라 만남을 주선하는 등 이른바 대변자 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경험과 개인사적인 이야기(We all have the stories.)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또 그 과정에서 우리들의 꿈은 어떻게 달라져야 했는지 함께 얘기하면서 운 적도 많습니다.



- 한인사회 처음으로 정치인이 태어나는 것이니, 심리적으론 당연히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부 정치적 이념이 다른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왜 보수당을 택했습니까?

“저는 어느 특정 정당의 당원도 아니었고 정치적인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처음 이사를 갔을 때 이웃들이 다정하고 편하면 오래 살듯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C3 활동을 하면서 여러 정부 기관의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런데 장관이든 수상이든 봉사단원들이든 보수당 사람들을 만났을 때 진실하고 마치 제가 제자리에 앉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생각해보면, 보수당의 정치이념(policy)이 한국 사람의 정서에 잘 부합됩니다.
대표적으로 가족관계에 최고 가치를 두고 있다거나, 매우 강한 직업윤리(Strong family value, good and hard work ethics)를 가지고 있다든가 하는 점입니다.


또 한국 사람들은 매우 다이내믹합니다.
어떤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화이팅(fighting!)하면서 도전하는 정신이 있습니다.
교회 총회에서 보더라도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얼굴 벌개져서 언성을 높이고, 저의 엄마만 보더라도 ‘야야 큰일났다’ 하다가 갑자기 ‘국 먹을래?’ 하십니다.
이렇게 다이내믹하고 드라마틱한 태도는 정치적 자질과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모든 것들을 보면서 자랐고, 또 캐나다 연합교회 교단이 매우 강하고 조직적이어서 자연스럽게 대화의 방법이라든가 조직을 이해하고 운영하는 훈련을 쌓아왔습니다.



-선거는 언제 있을 예정입니까?

“2009년 10월 19일입니다.
그런데 이미 공천을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 안에 보궐선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정치는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 ‘돈 없으면 정치할 수 없다’고도 합니다.
어떤 서포팅 그룹을 가지고 있습니까?

“정말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지만, 이렇다 할 정치자금은 없습니다.
제가 정계 재계에 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잣집 딸도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캐나다가 진보된 민주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 같은 보통사람이 의원이 된다면, 캐나다의 민주화 정도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캐나다는 정치후원금에 대해서 1인당 1100달러까지 세금공제(Tax Return)를 해주는 등 기타 다른 후원금보다 혜택을 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면 특별한 정치자금이 없어도 의회에 진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출마하는 트라이시티 선거구에 약 8%의 한국사람이 있는데, 보통 당락을 결정하는 표차가 2-3% 안팎인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큰 변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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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아 마틴의 이력]

연아 마틴(Yonah Martin) = 현재 뉴웨스트민스터-코퀴틀람 지역의 보수당 연방 후보(the Conservative Candidate of the federal electoral district of New Westminster-Coquitlam, which includes much of Port Moody)다.


서울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1972년 일곱 살 때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했다.
UBC를 졸업(a Bachelor of Education degree)한 뒤, 1987년 아보츠포드의 W.J. Mouat 세컨더리 스쿨을 시작으로, 버나비와 코퀴틀람 지역에서 만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교사로서 재직하고 있다.


1995년 석사 학위(a Master's degree in Curriculum and Instruction)를 취득했으며, 현재 코퀴틀람에 있는 Banting Middle School에서 영어와 프랑스 어를 가르치고 있다.


15세 때부터 교회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해온 그녀는, 마침내 세대간 민족간 다리 역할을 하기 위해서 한인 2세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차세대봉사단체 C3(Corean Canadian Coactive)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을 지냈다.


한편 정기적으로 CBC 라디오 방송의 토론자, 발제자로서 활동해 왔으며, 한국 KBS-TV의 60분짜리 다큐멘터리 ‘한민족 리포트’ 등 미디어를 통해 교민사회의 위상을 알리는 데도 노력해왔다.


이러한 그녀의 헌신적인 사회봉사활동은 여러 차례 영예로운 상( the 2004 Spirit of Community Award for Cultural Harmony //as one of Vancouver’s “bright lights” in the 2006 Best of Vancouver issue of Georgia Straight)을 안겨주면서 각계 각층으로부터 뜨거운 격려를 받았다.


얼마 전 별세한 김이성 장로의 세 자녀 중 맏딸이며, 대안학교 교사로 재직중인 더글라스 마틴(Doug Martin) 사이에 12세 된 딸, 미선(Kiana)을 두고 있다.


글, 사진=최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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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밴쿠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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