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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억새는 갈바람에 흔들리고

정란숙/중앙일보 문화센터 문학교실 회원








추억이 많은 사람은 외롭지 않다.


사람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모습이 변하지만, 추억 속의 풍경과 사물 그리고 함께 했던 사람들은 기억 속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언제든 현실로의 귀환이 가능하다. 기쁠 때나 슬플 때, 힘들고 지칠 때 곁에 찾아와 위로와 힘이 되어준다.

수그러지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의 긴 꼬리가 자취를 감추고 불어오는 바람이 까닭 없이 설레는 계절이다. 종류는 다르지만 이곳에선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억새들이 하늘을 이고 출렁이는 때이기도 하다. 설레는 마음과는 달리 계절의 변화에 민첩하게 따라오지 못한 내 몸은 며칠 전부터 여기저기 삐걱거리다 단단히 몸살이 났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덩달아 약해지는 지 나이를 먹을수록 늘어난 몸무게처럼 욕심에 사로잡혀 힘들어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불필요한 욕심에 지친 내가 가여워서 하루 휴가를 주기로 했다. “한 박자 쉬게 되면 삶의 여유는 두 배가 된다.”는 그럴듯한 광고 문구가 적힌 차 상자에서 티백을 꺼내 뜨거운 차를 만들어 햇살 좋은 뒤뜰로 나갔다. 가을 햇살 속에는 모든 만물이 욕심을 내려놓고 본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묘한 힘이 있는 듯했다. 마음은 어느새 햇살을 따라 지천명의 나이를 거슬러 30년 전으로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학교 3학년 가을까지는 대학에 가기 위해 고생했던 고등학교 시절을 보상받고 싶었다고 변명하기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공부를 제외한 대학생활을 즐겼다. 돌아온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결심을 한다고 쉽게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캠퍼스 가득 가을이 짙어가던 그 날은 비가 내렸다. 마침 다음 강의까지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즐겨가던 찻집에 들려 비 오는 캠퍼스를 내려다보며 감상하느라 전공수업에 늦어버렸다. 헐레벌떡 강의실에 도착하니 늦게 오는 나를 위해 친구가 자리를 잡고 내 책을 펼쳐 놓았다. 교수님께 들키지 않으려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는데, 책 위에 파스텔로 예쁘게 만든 메모가 놓여있었다.

며칠째 내리는 비 때문에
햇님이 보이지 않는 날
오늘처럼 안개비가 내리면
화왕산 정상의 어욱새와
그 산기슭의 통나무 찻집이 생각난다.
올 가을이 가기 전에 꼭 한번 가보길
- 햇님에게

나를 햇님이라 불러주던 같은 과 선배였다. 몸이 약해 두 번이나 휴학을 하고 지난 학기에 복학했던 선배와는 전공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가까워졌다. 크고 작은 문예지에 시를 발표할 만큼 실력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문학이 좋아 국문학과에 왔다고 했다. 책 읽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실상은 영어를 잘하지 못해도 힘들지 않을 것 같아 국문학과를 선택한 나와는 많이 달랐다. 어쨌든 선배는 뒤늦게 정신을 차려 공부하기로 결심한 내가 도움을 청할 때마다 기분 좋게 도와 주었다.

가을축제와 중간고사 그리고 친한 친구의 입대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지나간 뒤, 나와 친구들은 선배가 추천한 화왕산이 있는 창녕으로 머리를 식히러 갔다. 그곳에 대한 정보라고는 해발 750m 산 정상에 홍의장군 곽재우와 의병들이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화왕산성이 있다는 것 정도였다.
몸이 약한 선배가 갔던 곳이라면 학교 안에 있는 작은 산 보다 조금 더 오르기 힘든 곳 일거라 착각하고 자신만만하게 산을 올랐다. 투명한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과 숲의 향기를 품고 간간이 불어 오는 바람이 어우러진 가을 산의 아름다움에 취해 걷다 보니 힘들지 않게 중턱을 지났다. 여태껏 아름답고 쉬웠던 게 무색하게 그 지점부터 조금씩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산에 오기 전 생각 했던 것보다 정상의 억새를 보는 일이 훨씬 더 힘들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밀려 왔다. 그 예감은 하산하던 등산객들이 “여기서부터 시작해 대략 100m 까지가 조금 힘이 드는 깔딱고개 혹은 환장고개이고 그 구간만 지나면 정상”이라고 설명해 줌으로써 사실이 되어 버렸다. 산은 쉬이 정상을 내어 줄 수 없다는 듯 갈수록 점점 더 가팔라지고 급기야 길에 얼굴이 닿을 만큼 엎드려서 올라야 했다. 이름에 걸맞게 숨이 깔딱 넘어가고 환장할 정도로 힘들어져 차라리 이 상황이 꿈이었으면 할 즈음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오후 3시, 가을 햇살을 머금은 은빛 물결이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능선을 따라 평원 가득 넘실대고 있었다. 경이롭고 황홀한 풍경에 매료되어 좀 전의 힘들었던 순간은 잊은 채 내 키보다 훨씬 큰 억새 사이로 걸었다. 그 옛날 백성들을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이들의 함성이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물결에 실려 들리는 듯했다. 그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은빛물결이 노을에 물들어 황홀한 금빛물결로 변해 장관을 이루었다. 크고 작은 걱정들이 그 물결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화왕산 억새의 추억은 그 후 힘들어 지칠 때나 문득 세상에 혼자인 것 같이 허전할 때 든든한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주었다. 뛰어나게 영리하지도 강인하지도 못한 내가 한국을 떠나 시작한 이국 땅에서의 삶은, 수시로 숨이 차오르게 힘든 깔딱고개를 오르는 것 같은 날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굳건히 지날 수 있었던 것은 그 고개를 지나면 은빛 물결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리도록 청명한 하늘에서 따사롭게 내리는 햇살이 감사한 날이다. 가을 햇살에 부지런히 잎을 물들이며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이른 봄부터 뜨거움과 폭풍의 여름 동안 부지런히 만든 열매를 영글고 있는 나무가 대견해 보인다. 이제 나무는 겨울이 오기 전에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봄의 따사로운 기억과 이글거리는 태양과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푸르고 무성했던 여름날의 기억 그리고 가을날 아름답게 물든 잎과 열매 기억으로 춥고 긴 겨울을 지나며 새로운 봄을 준비 할 것이다.

불필요한 욕심 때문에 지친 지천명의 나에게 약관의 내가와서 다 괜찮다고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고 위로해 주었다. 겨울을 준비하는 가을 나무처럼 욕심은 내려놓고 그 동안 돌보지 못한 자신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아침이 먼 훗날 좋은 추억이 되어 줄 거라 믿는다.

환장하게 아름답던 은빛 어욱새가 몹시도 그리운 날이다.

정란숙/중앙일보 문화센터 문학교실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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