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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러>김치와 라면이 싸운다면?

허선영 제1회 텍사스 한인예술공모전 대상 수상자

가족들과 미국땅이라고 설레어 하며 처음 밟은 곳은 옥수수 밭이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진 인디아나의 시골 마을이었다. 처음 기숙사를 배정받고, 6살 4살 아이들과 함께 한 일은 라면을 끓여 먹는 일이었다. 한국 아이들치고 김치를 너무 좋아하는 울 집 꼬맹이들은 김치가 없음에 툴툴거렸지만 오랜 비행 끝에 먹게 된 고향의 맛에 김치의 부재 따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후루룩후루룩 잘 먹었다.

달랑 여행용 가방 4개뿐이었다. 밥상도 없이 바닥에서 라면을 먹던 아이들은 말 그대로 영락없는 거지꼴 이였다. 대충의 짐을 풀고 하다못해 아이들 군것질거리나, 아님 생각만 해도 입안에 군침을 돌게 만드는 김치라도 구입해야했다. 수소문 끝에 하나밖에 없다는 한국마트로 무작정 차를 몰고 나갔다. 기대를 너무 했을까? 시골에나 있을 법한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없는 것 보단 낫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이곳은 유학시절 내내 삶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 되었다.

대부분의 한인들은 큰 장은 두세 달에 한 번씩 차를 타고 북쪽으로 3시간이 넘게 걸리는 시카고의 중부시장으로 가서 차에 실을 수 있는 한 최대치로 장을 봐오곤 했다. 우리 가족도 아이 둘을 태우고 시카고에 가서 일박이일 여행을 하고 오는 길에 미니밴에 발 딛을 틈도 없이 꽉꽉 채워오곤 했지만 급하게 떨어진 콩나물이나 삼겹살 그리고 김치들은 오아시스 같은 작은 가게에서 조달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우리 집 꼬맹이들은 ‘학교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하고 가방을 벗으면 곧바로 냉장고 문을 열고 김치를 꺼내 손으로 우적우적 먹어댔다. 학교 급식이 입맛에 맞질 않아서 김치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고 했다. 스파게티를 먹어도 김치가 있어야하고, 스테이크를 먹어도 김치가 있어야했다. 이렇게 먹어대니 유리병 한통은 삼사일을 견디지 못했다. 김치 때문에 빠듯한 살림에 허리띠를 졸라매는 게 티가 나질 않았다.



한국에서의 김치는 언제나 엄마의 몫이었다. 김치냉장고에 김치가 떨어질 때쯤 나의 전화 한통이면 갖가지 김치가 지방에서 택배로 착착 올라왔다. 엄마가 김치를 담그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기만 했고 가끔씩 뜯어서 주는 김치를 넙죽넙죽 받아먹기만 했지 스스로 김치를 담그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손에 물은 묻혀도 고춧가루는 정말 안 묻히고 싶었다. 하지만 막연한 상상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 허탈감과 두려움이란... 넉넉지 않은 유학 생활에 김치 가격의 압박에 무너져서 시카고에서 배추 한 박스와 무 한 박스, 고춧가루, 까나리 액젓, 멸치액젓, 굵은 소금, 찹쌀가루 그리고 빼 놓으면 안 되는 커다란 다라이와 소쿠리 등등을 일단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에게 굳이 국제전화를 걸 필요도 없었다. 어찌나 살림에 똑소리 나는 아줌마들이 많은지, 일필휘지로 휘리릭 써준 김치 레서피를 건네받고 파이팅을 외치며 김치를 담갔다. 난 그때 어깨너머로 건너 배운다는 것에 대한 중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 한 것치곤 스스로에게 80점은 줄 수 있는 너무나 괜찮은 맛이었다. 사실 그때는 배추에 소금 뿌려 고춧가루만 조금 발라줘도 땡큐를 연발할 만큼 식구들이 김치에 굶주려 있기도 했다. 그렇게 입문한 김치의 세계에 지금 12년째 발을 담그고 있다. 이제는 내가 똑소리 나는 아줌마가 되어 김치 초짜들에게 휘리릭 레서피를 써주는 입장이 되었다. 사람은 늘 진화한다. 하하!

김치는 다른 어떤 한국 음식보다 엄마를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나의 무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김치에 대한 자부심은 남달랐다. 하지만 아이들은 서서히 미국식 입맛에 길들여져 갔고 학교 다녀오면 찾기 바빴던 김치는 냄새의 벽을 넘지 못하고 서서히 아이들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래도 여전히 김치를 담는 날에는 세 아이들이 줄을 서서 김치를 넙죽넙죽 받아먹지만 예전만 하지 못한 김치사랑에 내 자존심에도 약간의 스크래치가 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며 김치 이야기가 나왔다.
“난, 아들딸 시집 장가가도 김치는 내 손으로 담가주고 싶어.”
나의 말이 끝나자 친구들이 웃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뭐 하러 힘들게 그래, 사먹으라 그래.”
“사위랑 며느리가 한국 사람이면 몰라도 아니면 냄새 난다고 안 먹을지도 몰라.”
“맞아. 고맙습니다. 어머니. 하고 쓰레기 통으로 직행할 수도 있어.”
순간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친구들의 말들은 정말 맞는 말이었다. 내 김치들이 쓰레기 통으로 떨어지며 울부짖는 모습을 상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김치는 이제 나에게 자존심이고 아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엄마의 향수였다.

그렇게 조금씩 김치에 대한 나의 자존심이 무너지고 있을 때 쯤 하이스쿨에서 봄방학으로 여행을 떠난 큰아이 둘이 일주일 만에 집에 도착했다. 느끼한 외국 음식만 내내 먹고 얼마나 김치가 먹고 싶을까! 나는 아이들이 도착하자마자 불고기와 김치를 차려주면 ‘바로 이 맛이야!’를 외치고 허겁지겁 먹을 아이들을 상상했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아이들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라면을 외쳤다. 불고기와 김치는 안중에도 없이 라면의 면발을 후루룩거리며 잘도 먹었다. 그리고 ‘아, 이 맛이야. 정말 먹고 싶었어.’라며 밤새 마신 술 때문에 쓰린 속을 달래며 해장을 하듯 국물까지 남김없이 마셨다.

슬프게도 김치의 존재가치는 여기까지였다. 라면을 이기지 못했다. 나는 다시 미래에 대한 상상을 수정해야만 했다. 친구들의 말마따나 김치는 아이들이 알아서 사먹게 내버려두고 더 이상 엄마라는 존재의 가치를 김치에 대입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적어도 엄마라는 존재가 라면은 이길 거라고 자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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