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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 목사의 이민과 기독교]초기 일본계 이민자들의 종교

일본인들의 미국 이민은 1882년 중국인 이민 금지법이 그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하와이의 농장들은 중국인들을 대신할 인력이 필요했고, 일본 정부는 인구 과잉으로 해외 이주를 장려했습니다. 1885년부터 약 40년 동안 약 20만명의 일본인들이 하와이로 이주했고 이중 90%가 다시 미국 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일본계 이민자들의 대부분은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이나, 캘리포니아의 과일 농장, 그리고 북서부의 목재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 중 40%는 미국에 남았고 대다수가 채소와 과일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도시에 정착한 이들도 증가하여 샌프란시스코와 LA 등에는 “리틀 도쿄” 지역도 생겼습니다.

일본계 이민 패턴이 중국계와 다른 점은 여성의 비율이 40%에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중매 문화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많은 “사진 신부”들이 올 수 있었습니다. 가족 중심의 생활이 가능하여 1940년에는 자녀 세대가 3분의 2를 차지했습니다.

일본인 이민자들을 대표하는 종교는 불교였습니다. 일본인들을 고용한 농장주들은 종교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고 불교 전통을 인정했습니다. 요도 신수라는 교단의 불교가 번성하였는데, 1898년 샌프란시스코 30명의 젊은이들이 YMCA를 모델로 하여 불교청년회를 조직하여 매주 경전을 공부하고 친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듬 해 샌프란시스코의 일본인들은 본국의 불교 교단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열정 어린 편지를 받은 일본에서 두 명의 선교사가 파송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식을 인도하고 설법하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후 더 많은 선교사가 일본으로부터 도착하여 영적인 안정감을 더했고 불교 부녀회가 창설되어 여러 곳의 모임과 친교를 지원했습니다. 불교 사원이 오클랜드, 새크라멘토, 프레스노, 팔로 알토 등에 세워져 일본 이민사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1910년부터 미국사회에 일본계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감과 편견들이 증가했습니다. 일본인들은 농사나 사업을 위해 땅을 소유할 수 없었고 미국 시민이 되는 길이 막혔습니다. 아일랜드인은 고향에서처럼 말하고, 이탈리아인들은 고국에 사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도 미국인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일본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방인일 뿐이었습니다.

일본계 이민자들에게 혹독한 환경은 오히려 불교의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미 서부 해안 지역의 일본 불교 사원은 1920년대 이르러서는 25곳으로 증가하였습니다. 물론 개신교적 문화가 강한 미국에서 자신들이 불교도인 것을 알리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차별과 압력이 증가할수록 불교 사원은 점점 더 중요한 이민 사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민이 완전히 중지된 1924년부터 2차 대전 중 강제 캠프 생활까지 일본인이 개인적으로 사회적 압력을 대처할 수는 없었습니다. 불교가 서로를 지지하고, 영적인 안정을 제공하고, 내세에 대한 소망이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민자들의 종교는 그 마음의 평안과 공동체 형성의 중심이 됩니다. 새로운 정착지와 구분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거나 더 이상 절실하게 공동체의 필요를 느끼지 못할 때 이민자의 종교는 그 동력을 잃게 됩니다. 일본계 2세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전통 불교를 떠나고 기독교 등 다른 종교적 선택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사랑 커뮤니티 교회 담임, McCormick 신학교 겸임교수]


김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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