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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수감중 펴낸 'BBK의 배신')에 쓰지 못한 진실 모두 말하겠다"

'김경준의 주홍글씨' BBK를 말한다 #1

박범계 의원 보호소로 접견와
"추방 이의제기 해보자" 제안
정치적 계산에 "1초도 싫다"
유원일 전 의원도 함께와 불편
접견 몰래 녹음해 '나꼼수' 전달


한 사건의 진실에 대한 이해는 양쪽 당사자의 '공통 진술'과 '엇갈리는 주장'을 아는 데서 출발한다. 마찬가지로 만약 BBK 사건 역시 김경준의 이야기를 그의 관점에서 들어야만 진실에 좀 더 가까워 질 수 있다. 더욱이 전직 대통령이 수백억 원 규모의 주가조작에 관여했는지 여부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전제라면 그의 증언 청취는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차기 정부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MB) 집권 당시의 의혹들을 재조사한다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기사는 시간을 거슬러 그가 직접 서술하는 연재 형식이다.

3월28일 천안교도소에서 출소했다. 큰 감흥은 없었다. 수감생활에서 몸으로 배운 것이 있다면 날짜를 잊는 것이다. 출소일을 계산할수록 시간은 더디게 갔다. 그래서 잊고 지냈고 그러다 보니 그날이 왔을 뿐이다.

"김경준씨 출소 준비하세요."



습관처럼 오전 운동을 마치고 방으로 오니 나갈 시간이 됐다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일부 언론에서 내 출소일이 원래 30일이고 조기 석방된 것이라고 보도했다. 사실이 아니다. 형법상 구속되는 날을 하루 형기로 계산한다. 또 징역형 복역을 마치고 벌금을 노역으로 대신하면서 사실상 다시 구속됐기 때문에 또 하루가 빠진 것이다.

이미 짐은 싸뒀다. 가방 2개와 사과 박스 2개가 전부다. 책과 소송 관련 서류들을 넣었다. 그중 하나가 대법전이다. 대부분의 재판에서 나는 변호인 없이 난해한 대법전을 읽으며 스스로 변호했다. 버릴 수 없는 책이다.

친하게 지내던 교도관들이 와서 작별인사를 건넸다. "고생했습니다." "유감이에요."

한국에서 거의 10년간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난 줄곧 독방에서만 지냈다. 난 사형수나 흉악범도 아니었지만 외부와 접촉이 차단된 채 생활해야 했다. 내게 유일한 대화상대인 교도관들은 그동안의 내 고충을 잘 알고 있었다.

출소했으니 공식적으로 난 자유였지만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여전히 '특별관리 대상'이었다.

보호소 밴을 타고 나가던 중 갑자기 교도소 측에서 밴을 세웠다. 국회의원이 찾아와 나와 만나고 싶어한다고 했다. 곧 교도소장이 외부인 3명과 함께 나타났다. 박범계 의원과 유원일 전 의원(18대 창조한국당 소속)과 다른 일행 1명이다. 박 의원이 물었다. "이따가 내가 보호소로 찾아갈 테니 만나주겠습니까."

2시간쯤 지나 보호소에서 박 의원 일행과 마주 앉았다. 만나겠다 했지만 난 그 자리가 불편했다. 함께 온 유 전 의원 때문이다. 그는 밖에서 내 후견인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5~6차례 날 접견왔던 그는 나와의 접견 내용을 내 동의없이 녹음해서 '나꼼수'에 전달했다.

(2012년 3월11일 팟캐스트 라디오 '나는 꼼수다'는 김경준의 육성을 공개했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선 후보 측이 김경준의 입국을 기획했고 이를 검찰이 알고도 묵살했다는 내용이다.)

나는 그 방송을 듣지못했지만 방송 때문에 한동안 곤욕을 치러야 했다. 유 전 의원이 녹음기를 교도소내로 반입했기 때문에 문제가 됐고 무엇보다 대화 내용의 파장이 컸다.

검찰이 수사를 한다고 했고 별도의 교도소 자체 내사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교도소 내사는 수감자 입장에서 '징벌방행'을 뜻한다. 짧게는 열흘 길게는 한 달 동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 한가운데 앉아만 있어야 한다. 벽에 등을 기대는 것조차 금지다.

석방됐지만 여전히 특별관리
LA행 탑승 직전에 수갑 풀고
아시아나 직원은 여권 압수


다행히 징벌방은 면했지만 나를 향한 감시는 더 심해졌다. 그는 내 대변인이 아니라 내게 피해를 준 사람이다. 사실 유 전 의원뿐만이 아니다. 국회의원이나 국회 입성을 꿈꾸는 자들은 대부분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교도소로 날 찾아왔고 내 말을 이용했다.

"이 사람(유 전 의원)과 함께 오시면 전 박 의원님과 대화 안 합니다."

유 전 의원은 '오해가 있었다'면서 일단 얘기를 들어달라고 했다. 박 의원은 "김경준씨 추방당하지 않도록 이의신청을 해보시면 어떨까요"라고 내 의견을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추방되지 않는다는 것은 계속 구속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생각해보라. 난 10년 가까이 독방에서 지냈다. 대한민국 전 국민이 날 욕하고 비난했다. 내가 왜 더 갇혀있길 원하겠는가. 당시 언론에서도 내가 추방 이의신청을 해 국내에 계속 있고 싶어한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출소일까지도 정치인들과 언론의 희망사항이 마치 내 의지인 것처럼 비춰졌다.

박 의원에게 동의했던 것은 하나뿐이다. 그는 "MB도 적폐청산 대상"이라고 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하고 만약 청문회가 열린다면 증인으로 참석해 증언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면담은 40여 분 만에 끝났고 그날 밤을 보호소에서 보냈다.

다음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표는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한 달 전에 미리 사뒀다. 공항에서도 '특별관리 대상' 대우는 이어졌다. 수갑을 풀어주지 않았다. 공항에서 기자들을 발견하고서는 그제야 급히 수갑을 풀었다. 비행기에 탄 것도 이륙 5분 전이었다.

그런데 아시아나 항공사 직원이 내 여권을 가져갔다. 법무부나 경찰도 아니고 항공사 직원이 왜 내 여권을 압수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비행기에 타서야 난 비로소 자유를 경험했다. 장기복역 후 출소해서 가족에게 돌아가는 길이니 11시간 기내에서 많은 상념이 떠올랐을 거라고 추측할지 모른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출소 5일 전부터 먹기만 하면 설사를 했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기내에서도 15번 이상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

11시간은 금방이었다. LA국제공항 입국장에서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난 언론을 믿지 않는다. 미주지역 언론도 내 누나와 MB가 마치 무슨 부적절한 관계인 양 추측성 보도를 쏟아냈다. 나와 MB가 만든 'LKe뱅크'라는 회사명의 e가 내 누나의 이름(에리카)이라는 기사도 있었다. 무식한 소리다. L과 K는 이명박과 김경준이 맞다. 하지만 소문자 e가 '인터넷뱅크'를 뜻한다는 건 상식이다.

한바탕 씨름을 하고 기자들이 돌아갔다. (그는 본지와 지난 인터뷰에서 이 내용을 밝힌 바 있다.) 마중나온 가족들이 걱정됐다. 며칠 전 가족들과 통화하면서 "기자들이 많이 오면 나한테 오지말라"고 했다.

휴대폰이 없어서 공중전화를 찾았다. 대부분 고장이었다. 공항직원의 도움으로 가족과 어렵게 통화했다. 30분 만에 가족과 만났다. 나도 가족들도 펑펑 울었다. 10년 만에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은 집에서 피자를 시켜 함께 먹었다. 거짓말처럼 설사가 멎었다. 집에 왔다는 것을 내 몸이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동안은 구속된 몸이었기 때문에 난 말을 아껴야 했다. 교도소에서 쓴 책에도 민감한 내용들은 싣지 못했다. (2012년 그는 'BBK의 배신'이라는 수기를 펴냈다.) 이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사실이 아닌 것은 진실을 가르쳐주고 사실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이유도 설명하려고 한다. 내 이야기를 시작한다.


정리=정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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